브릿G에서도 연재합니다.

(연재처 링크)



여명을 쏜 아이


2. 칠흑빛 밤



“머리 색이 그게 뭐냐? 아니, 눈썹 색까지……재호 네가 어떤 집 손자라고 이런 양아치 같은……!”

아림이 보는 앞에서 할아버지가 재호를 향해 언성을 높인 것은 재호가 대학에 입학한 해 4월 첫 토요일의 일이었다.

그날 오후, 금요일에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재호의 머리카락 색은 거의 백금발이었다. 머리카락뿐 아니라 눈썹도 색이 옅어져 있었다.

잘 어울리네. 빈말도 아니고 빈말일 이유조차 없는 한 마디를 편하게 던져도 재호의 얼굴은 심각했다.

“오늘 같이 집에 가 줘.”

‘반항’을 권유한 것은 누나이니 할아버지에게 머리카락을 몽땅 뽑히기라도 하면 책임지라는 듯한 눈빛이다. 그 눈빛을 보고 아림은 웃을 뻔했다.

동시에 만감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두 달 전의 권유를 재호가 실천에 옮긴 것이 내심 신나기도 했지만, 눈썹까지 탈색한 모습을 보고 여섯 해도 더 전의 어린 재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빛깔이 변한 것은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뒷머리에 시선이 쏠려서 잘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눈썹도.

그 일은 그날만의 일이 아니다. 아림은 순간 직감했으나, 그 직감을 입에 담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재호가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다행일까.

“다른 집 자식들이 대학에 와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다닌다고 너까지 덩달아 방종할 일이냐? 더구나 넌 원래대로면 고등학교[한국 나이 18세, 고 2] 다닐 나이인데……아림이 넌 재호가 이럴 때까지 뭘 한 거고?”

한탄하던 할아버지의 화살이 아림에게로 향한다.

……그야 재호도 이젠 어엿한 대학생이니까요.

“2회나 탈색하고서 도로 흑발로 염색하면 머리카락 상하고 색도 금방 빠져서 품행이 단정치 못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꾸를 조심스레 내놓을 용기를 내기도 전에 재호가 조용히 대답했다.

“이대로 몇 달 지내 보고 할아버지 말씀이 옳다 싶으면 검은 머리로 지낼게요.”

그리 말을 끝맺고서 재호는 할아버지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늘 강건하고 완고하게만 보였던 할아버지는 벌어진 입도 다물지 못한 채 어이를 잃은 표정으로 재호가 사라진 방향만 한동안 바라볼 뿐이었다.





재호가 머리카락 색을 바꾼 뒤로도 하루하루의 일상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재호는 성실하게 대학에 다녔고, 품행도 방정했다. 명색이 이 나라의 제일가는 명문대라는 이곳에서도 ‘누구나 노는 새내기 때엔 성적장학금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다들 반 우스갯소리로 키득거리기는 하지만, 남들이 새내기의 여유를 즐기든 현실을 직시하고서 학점 관리에 열중하든 재호에게 전 과목 A+는 당연지사였고, 강의에 결석은커녕 지각 한 번 하지 않았고, 동아리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으며, 밤 열 시, 늦어도 열한 시 이전에는 반드시 집에 돌아왔다.

그새 해가 한 번 바뀌어 2017년이 되었고, 재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백금발이었다.

“아림아, 그 자전학부(자유전공학부) 16학번 권재호, 너랑 사촌이지?”

산기슭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드넓은 캠퍼스 안에 어느 사이에 소문이 났는지, 새내기 시절부터 PEET 준비와 응시, 면접 스터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함께하고 운 좋게 작년에 나란히 약대 동기가 된 민경이 불쑥 물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사촌끼리 나란히 캠퍼스를 걷던 중에 이 친구와 멀찍이서 잠깐 눈인사만 나누고 지나쳤었다.

“그건 어디서 주워듣고.”
“야, 주워들었다니 뭔 말이 그래? 나 같으면 그런 친척이 후배로 들어오면 매일 자랑하고 다니겠다.”
“걘 그런 거 안 좋아해.”
“뭐, 뭐래……잠깐만, 네가 재호 매니저라도 돼? 하긴 그럴 만도 하네……예쁘지, 잘생겼지, 어린데 매너 좋지, 똑똑하지, 신비롭지, 누구나 다 한 번씩 쳐다보는데, 이미지 관리 해야지…….”

저 혼자 중얼거리는 민경을 앞에 놓고 아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매니저’인가.

재호는 인기 연예인. 나는 그 매니저. 할아버지는 재호의 소속사 사장님.

그런 모양새가 갖추어진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인지도 모른다. 단지 그 중 아무도 재호가 ‘인기 연예인’이기를 바라지 않았을 뿐.

헌데, 재호가 아림이 다니는 대학에 온 것은 엄밀히는 할아버지의 뜻이 아니었다.

재호가 고 3이었던 제작년. 해외 유학이 좌절되고서, 재호는 학생설계전공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나노바이오정보학?’”

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을 치르고 일단 복학한 뒤 합격까지 확인하고서 한숨 돌린 9월의 어느 날, 아림은 그새 그럴싸한 명칭까지 만들어진 예비 학생설계전공을 전해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노기술과 생명공학기술을 융합한 학부라면 국내에도 이미 몇 군데 있잖아. 여기에 IT를 접목하는 거야.”

그렇게 한 마디로 요약이 가능한 학생설계전공 계획은 이미 제법 근사하고 구체적이었다.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는 재호의 까만 눈은 모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무엇 때문에 이런 모험에 나서기로 결심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막연한 짐작만 갈 뿐이지만, 적어도 아림이 보기에 재호는 스스로 전공을 만들어 가는 일에 열중해 있는 듯했다.

남들보다 2년쯤 이른 시기에 대입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전공까지 스스로 설계하는 사촌 동생이 새삼 대단하고 대견하지만, 그보다도 재호의 그늘 없는 눈빛에 아림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학생설계전공이 가장 활성화된 학교라는 이유로 재호는 아림이 재학 중이던 대학에 지원했고, 거뜬히 합격했다.

이번 학기부터, 재호는 그때 아림에게 이야기한 바로 그 전공을 승인받아 본인의 학업 계획대로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고 있었다. 정원 1명의 전공 생활이 외롭거나 어색하지는 않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즐겁다고 하였다. 그만큼 여러 학과의 사람들을 접하는 기회를 누릴 수 있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대로 이끌어 가는 학업이 어엿한 전공으로 인정받아서 기쁘고 보람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재호가 살아 온 십수 년의 삶은 ‘집안과 주위 어른들의 기대에 걸맞게 착하고 모범적인 아이’의 삶이었다. 언동도, 하루하루의 일과도, 거쳐 온 학교도 하나같이 그 증거였다.

지금도 머리카락민 탈색했을 뿐이지, 남들이 기대하는 대로 착하고 모범적이기는 매한가지일지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전공 커리큘럼만이라도 스스로 주도하는 학부 생활은 재호에게 분명히 커다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재호가 여태 연애를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민경에게서 엉뚱하게 매니저니 이미지 관리니 하는 말을 듣고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주위에서 미팅이나 소개팅 권유 안 들어와?”

결국 재호와 함께 캠퍼스 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어느 날, 재호에게 불쑥 묻고 말았다.

“……들어오겠어? 웬만한 새내기보다도 어린데.”

당연한 사실을 묻는다는 듯한 답변이 잠깐의 침묵 뒤에 돌아왔다.

“그래도 너, 내가 사촌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매력적인걸? 그리고 요즘은 연하의 남자도 대세잖아.”
“……미성년 남자도 대센가?”

재호는 복잡한 표정이 되어서는 그렇게 대꾸하고 오므라이스를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달걀 부침과 볶음밥을 묵묵히 씹는 재호의 표정을 아림은 읽을 수가 없었다.

설마, 진짜로 누굴 사귀기라도 하면 내가 할아버지께 일러바칠 거라는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실없는 생각마저 따라오지만, 그 때문은 아닌지도 모른다.

물론 할아버지는 재호가 ‘아무하고나’ 연애한다면 극구 반대하시겠지만.

할아버지의 울타리 안에서 길러진 재호만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친손주들 모두가 알게 모르게 각자의 부모님에게 연애를 제약받고 있었다.

고종 사촌들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할아버지의 살아 있는 두 아들 각자에게서 난 손자 손녀들은 그러했다. 작은아버지네 두 남매도 그렇고, 아완과 아림은 부모님께 ‘격에 맞는 이성과 적절한 시기에 진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말씀을 질리도록 들었다.

다만 아들과 딸에게 하시는 말씀이 각기 미묘하게 달랐다.

아림에게는 ‘당장 좋아 보인다고 아무하고나 진도를 나가면 신세를 망칠 수 있다’고, 아완에게는 ‘누굴 만나 보아도 좋지만 사고만은 치지 말아라’고 하셨다.

실제로 오빠는 대학 재학 중에도, 인턴십 중에도 항상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눈치였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만 알면 쫓아가서 말리고 싶다고 아림은 가끔 생각했다. 오빠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쪽을 위해서다.

“야, 권아림.”

한 해의 두 번째 학기가 개강한 지 3주째의 토요일 늦은 아침. 대강 아침을 차려 먹던 중에 오빠가 불쑥 말을 던졌다. 명백히 악의적인 시비조의 부름에 아림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침 부모님은 아침 일찍부터 어디를 나가셨는지, 아림이 일어난 아홉 시 즈음에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너, 그렇게 권재호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더니, 어젠 뭐 한 거냐?”
“어제가 뭐?”

자진해 평범하다면 평범하게 해군 현역병으로 다녀온 군대에서 뭘 배워 왔는지 제대 후 한층 악질이 된 손위 남자 형제의 시비는 그렇다 치고, ‘어제’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 새끼, 간밤에 어디서 놀아나다 새벽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간 모양이던데. 부모님도 아침부터 전화 받고…….”

조부님과 아버지의 회사에서 인턴 도중에 무언가 물의를 일으킨 본인의 주제는 생각하지도 않고 쌤통이라는 듯 빈정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림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엄마? 재호, 무슨……어……네, 거기 어디에요? 어, 아니, 아뇨, 저도 가 볼게요!”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장소를 전해 듣고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마치고 집을 뛰쳐나왔다.

택시로 25분쯤 이동했을까. 아림은 강북의 한 대형병원에 당도했다.

재호가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연락이라면 할아버지에게서 왔을 것이다. 아무리 나쁘게 말했대도 ‘간밤에 어디서 놀아났다’라고 표현할 법한 경위면 할아버지께서 굳이 아들 내외에게 밝히지 않으셨을 텐데, 오빠는 뭘 그리 자세히 알고 있나.

뭔가 트집 잡을 거리라도 건지려고 할아버지 댁에서 일하는 분들을 아침부터 찔러 보았나. 할아버지와 재호에게 성심을 다하기는 하지만, 아완이 그렇게 나올 때 거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건 그렇고, 재호는 괜찮을까. 무사한 걸까.

병실 앞에 거의 다다른 즈음에 아림은 벽 가까이에 선 어떤 여성을 목격했다.

나이는 많아야 아림 정도일까. 아림만큼 급히 나온 듯한 기색이 옷차림에 완연하고, 울상을 좀체 감추지 못하며, 눈 주위가 빨갛다.

다시 눈시울을 훔치려는 낯선 사람에게 신경 쓸 겨를 없이 아림은 곧바로 병실에 들어갔다.

“재호…….”

이름을 중얼거리며 들어선 때, 침대 앞에 선 부모님과 시선이 마주쳤다. 두 분은 곧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재호의 머리맡에는 할아버지가 말없이 앉아 계셨다.

“재호 괜찮아요?”

아림은 목소리를 낮추어 어머니께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고는 물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쉿 하며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는 아림의 어깨를 살며시 끌었다.

이제야 재호의 모습이 눈에 제대로 들어온다 싶은 때, 아림은 당황했다.

새까만 머리카락.

분명히 어제, 처음 보는 아름다운 연갈색으로 머리카락 색을 바꾸고 나타났던 재호다. 그런데 이 색깔은.

하루 사이의 변덕으로 검은색으로 염색했다고 보기에도 너무나 비현실적인 분위기의 칠흑이다.

별 하나 뜨지 않은 밤하늘. 이런 심상이 떠오르고 만다.

“아림아…….”

당황하던 중, 한숨 같은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아림은 퍼뜩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쪽을 향한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허탈감과 배신감이 어려 있었다.

“어쩐 노릇이냐고, 응? 설명해 보란 말이다!”
“아버지!”

아림과 조부님 사이를 아버지가 끼어들어 막아섰다.

“어떻게 했길래 재호가 저런 근본 모를 계집애랑, 응?!”
“아버님, 그만하세요!”

무슨 영문인지 모를 말을 할아버지가 외치는 사이에 어머니가 아림을 밖으로 떠밀었다.

‘근본 모를 계집애’.

그 말을 들은 순간 병실 가까이에서 본 연배의 인물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다시 아림의 눈앞에 있었다.

재호가 저렇게 쓰러진 일과 이 사람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다만 재호가 어젯밤에 조부님 댁이 아닌 이 여성의 곁에서 어떤 식으로든 머물렀음만은 거의 확실하다.

아림이 연배의 낯선 여성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으니, 저쪽에서 먼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눈가는 여전히 빨갰다.

뜻하지 않은 자신의 무례에 움칫해 자리를 슬쩍 피하며 아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 진작에 이곳을 뜨는 편이 본인에게 좋았을 텐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던 할아버지의 노한 표정이 뇌리에 되살아난다.

뭘 어떻게 했길래 재호가—

무슨 대답을 해 드릴 수 있을까.

그렇게 물으신들, 자신이 재호에게 한 일이라고는 머리카락 색깔을 바꿔 보라는 권유뿐인데.





재호가 그녀와 처음 만난 것은 지난 해 봄, 처음으로 머리카락을 탈색하러 찾은 미용실에서의 일이었다.

지방 소도시 출신으로 작년에 상경해 2년제 대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그녀는 강북의 이모 댁에서 통학하며 이모가 운영하는 미용실의 잡일을 틈틈이 돕고 있었다.

재호가 두 번째로 그곳을 찾았을 때부터 그녀는 재호의 머리를 담당했었다. 그 무렵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여대생은 이미 솜씨가 상당했다.

실력만 좋은 것이 아니라, 손님 응대에도 센스가 있었다. 보다 진심 어린 사적인 대화에서도, 온갖 주제로 말을 주고받고 교감하는 데에 뛰어나며 상대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여성이었다.

졸업 전에 미용사부터 된 여대생이 자취를 시작한 올 초부터 재호는 그녀와 미용실 바깥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데이트 장소는 대부분 사람으로 북적이지 않고 그 나이 또래가 자주 찾지 않을 법한 공간들이었다.

재호나 그녀의 학교 근처에서, 혹은 밤늦은 시각에 둘이 만난 적은 없었다.

그리고 8월. 이번에도 탈색이나 염색을 할 거라면 백금발 외에 재호에게 훨씬 어울리는 색상에 도전해 봄이 어떻겠냐고 그녀는 제안했다.

몇 주 뒤 그에 긍정의 뜻을 전한 재호는 그녀에게 또 한 번 머리카락을 맡겼다. 아림도 그 주 금요일에 직접 본 예쁜 머리색이 그 결과물이었다.

그러고서 두 사람은 금요일 저녁에 다시 만났다. 목요일의 시술에 대한 답례라며 재호가 그녀를 불러내 데리고 간 곳은 할아버지와 두어 번 가 보아서 아는, 캐주얼하지만 결코 저렴하지는 않은 레스토랑이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고 함께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일출을 몇 분 앞둔 시각에 깨어난 재호는 작은 자취방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짓말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새까만 눈썹을 한 자신이 거울 안에서 자신과 마주 보고 있었다.

순간 숨이 막히고, 영문 모를 고통이 몸을 덮쳤다. 시야가 휘청햤다.

재호의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깨어난 뒤 재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천장과 큰아버지 내외의 무겁고 복잡한 표정, 할아버지의 침통한 얼굴이었다.

아림이 그날 귀가한 어머니께 들은 말씀에 의하면, 가벼운 뇌진탕 외에 집중적인 치료를 요하는 부상은 없지만, 몇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정밀검사에 들어갈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아림이 부모님과 재호에게서 듣고 종합한 그간의 대략의 경과였다.

쓰러진 다음 날, 재호는 어머니가 근무하시고 조부님의 삼남매가 이사로 있는 병원으로 옮겨지고서 한 달이 지나도록 입원실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밀검사에서는 이렇다 할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재호는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고 토하거나 복통 혹은 몸살을 호소하기 일쑤였다. 재호가 생기를 잃고 수척해져 가는 가운데, 머리카락은 여전히, 그날 본 그대로 한밤처럼 검었다.

뚜렷한 이유 없이 앓는 증상이 계속되기를 6주, 병원에서는 스트레스에 의한 몸의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며 보다 편안하게 자택에서 요양할 것을 권했다.

그 비현실적인 흑발에 대해서는 의료진 중 누구도, 부모님도, 조부님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재호가 퇴원하기 전까지 아림은 재호의 병문안을 한 번밖에 가지 못했다.

그 토요일 이후 다음 토요일이 오기도 전에 부모님으로부터 ‘할아버지와 말씀 다 나누었으니 재호와 마주치지 마라’는 말씀을 들었다.

장남인 아버지는 성실하고 할아버지와 생전의 할머니께 순종적이지만, 일단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할아버지도 좀처럼 꺾을 수 없었다.

그 고집으로 ‘재호가 벌인 일의 책임을 고작 다섯 살 위의 사촌인 아림에게 묻지 말라’고 일요일에 조부님께 강경하게 주장하셨던 모양이다. 평소에는 시댁 식구들과의 충돌을 가급적 피하는 어머니도 ‘재호는 어린애가 아니고 아림이도 재호 엄마가 아니다’라며 옆에서 거들고 나섰다고 하셨다.

두 분의 궁극적인 요구는 조부님더러 아림에게 더 이상 ‘재호의 누나 겸 엄마 노릇’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걸……저한테 먼저 말씀도 안 하고 결정하셨다고요?”
“어차피 넌 처음부터 할아버지랑 우리가 시킨 대로 따른 거잖아.”

어머니의 덤덤한 즉답에 아림은 말문이 막혔다.

이쯤 되니 아림으로서는 먼저 나서서 재호와 만나기가 애매하게 되었다. 재호의 건강은 걱정이 되지만, 사촌 동생의 불행을 가지고 자신 앞에서 대놓고 우쭐대는 오빠는 꼴도 보기 싫지만, 지금 재호 곁에 자주 있어 준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아림은 생각했다.

실상은 이참에 재호와 할아버지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선미 씨랑은,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고.”

병실 침대에 누워 재호는 묻지도 않은 말을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말이야. 바닥에서 잔다며 굳이 나더러 침대에서 자라는 걸……겨우 말려서, 선미 씨는 침대에서 자고, 난 바닥에 이불 깔고 잤어. 그런데…….”

목소리가 떨린다.

병실에 있지도 못하고 그 앞에서 울던 ‘선미 씨’는 이후로 한 번도 재호를 찾아오지 않았다.

만나고 싶어도 더는 만날 수 없었으리라. ‘감히 이 집안의 귀한 손자에게 꼬리를 친’ 그녀뿐 아니라 그녀 이모와 이모의 미용실에까지 본때를 보여 주겠다던 할아버지를 아림의 부모님이 겨우 만류한 것이 재호가 쓰러지고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다.

하마터면 아침 드라마 한 편 찍을 뻔했다.

그 일을 부모님에게서 들은 때, 이 모두가 남의 일인 양 그런 냉소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었다.

“왜, 그날 집에 들어가지 않았어?”

차라리 그날 함께 있지 않았다면 둘은 어른들에게 상처받지 않고 계속 관계를 이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혹시 그때 머리카락 색을 바꾸라고 권하지 않았더라면 재호는—

어렴풋이 고인 생각에 돌멩이를 던진 것은 재호의 대꾸였다.

“……누나도 그날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 의심하는 거야?”
“?!”

예상치 않은 반응에 아림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재호야, 내 말은…….”
“됐어. 누나도 똑같아……할아버지랑, 다른 어른들이랑.”

재호는 말꼬리를 흐리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방적으로 비난과 거절을 당하고 보니 화도 나고 혼란스럽지만, 그 감정은 이내 착잡함으로 바뀌었다.

평소의 재호 같지 않게 아이 같은 언동이다. 이토록 직설적으로 할아버지며 집안 어른들에 대한 반감을 토로하는 재호도 처음이다.

하기야 재호는 한국 나이로도 열아홉밖에 되지 않았다.

더구나 재호의 되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음도 사실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날 밤의 진상이 아닐 텐데도.

“있지, 난…….”

아림은 머뭇머뭇 말문을 열었다.

“선미 씨랑 네가……이렇게 돼서, 안타까워.”

결심하고서 털어놓은 말인데도 마치고 보니 후회스럽다. 재호는 아무 대답 없이 계속 창밖만 바라보았다.

1인 병실 안에 가습기 작동하는 소리만이 한동안 조용히 이어졌다.

“머리카락……지금도…….”

한참 뒤에 재호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재호는 저번에도 의외로 머리카락 색의 변화에 대하여 순순히 털어놓았었다.

8년 전 그날 아침, 뒤를 돌아 문을 쾅 닫은 어린 재호가 뇌리에 떠오른다.

“……이젠 탈색할 필요도 없겠네.”

자조적인 혼잣말이 ‘이제 곧 저세상 가겠네’라는 듯이 들려서 흠칫했지만, 그런 불길한 속마음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입원 6주째 되던 날, 집이 현재의 재호에게 편안한 장소일지 석연찮은 가운데 조부님 댁으로 옮겨진 재호는 한 달 후, 아림과 집에서 가까운 티하우스애서 약속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은 회복되었다.

2학기 기말고사도 끝나고 크리스마스도 지나간 12월 말. 다시 만난 재호의 머리카락은 평범하게 검고, 매우 짧았다. 그 모습을 본 아림은 안도감과 동시에 가슴속에 무거운 돌이 하나 내려앉는 감각을 느꼈다.

학기 초부터 병원에서만 6주를 지낸 데다 그 사이에 몸도 쇠약해지고 마음도 움츠러든 재호로서는 이번 학기 강의를 따라잡기란 무리였다.

결국 재호는 퇴원할 무렵에 한 학기 휴학을 신청했다.

“할아버지, 요즘 어떠셔?”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다툼 이후로, 아림은 할아버지를 한 번도 뵙지 않았다. 연락도 드리지 않았다.

재호가 그렇게 갑자기 앓아누운 상태에서 다가온 10월 초 추석은 가족 모임도 흐지부지된 채로 지나갔다.

“……글쎄.”

재호는 밀크티가 담긴 찻잔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중얼거렸다.

“한 10년은 늙으신 것 같아.”

만감이 얽혀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표정의 재호를 앞에 두고 아림은 아무 대답할 말도 찾을 수 없었다.

“……몸은 좀 어때?”

조심스레 화제를 돌리자, 재호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 있다.

“내년 봄엔, 복학해야지.”

누나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겠다는 듯한 그 미소는 평소의 재호 그대로였다. 그것이 도리어 아림의 불안을 부추겼다.

입원 당시만큼은 아니지만 재호는 여전히 수척하고 기운이 없다.

과연 내년에 무사히 복학할 수나 있을까.

재호의 몸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염려와 불안감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 가운데, 해가 바뀌어 2018년이 찾아왔다.

저녁을 먹고 방에 틀어박혀 스마트폰으로 아무 웹페이지나 들춰 보고 있는데, 폰 액정에 메시지 배너가 불쑥 떴다. 발신인은 재호였다.

웬일로 스마트폰 운영체제 기본 메시지 어플로 보내 온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려 메시지를 연 때, 아림은 흠칫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권아림 씨.
  막내 사촌 동생 분의 번호로 연락 드리는 점 양해 바랍니다.
  당신의 사촌 일로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3분 안에 전화번호 02-****-****로 통화를 시도할 테니, 수신 부탁드립니다.
  추신. 이 메시지와 통화에 관하여 주변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십시오.


……뭐 이런 재미없는 장난이 다.

어처구니없지만 영 석연찮은 메시지를 몇 번 더 읽어 보고 어플을 닫으려던 때, 정말로 전화가 왔다.

벨이 반복해 울리는 가운데 방금 전 문자에서 본 바로 그 번호에 시선을 박고 망설이다 아림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권아림 씨?]

저편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처음 듣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림은 바짝 긴장했다.

[문자, 받으셨겠지요.]
“대체 누구시죠?”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곱고 사무적인 음성의 답변에 부아가 치민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체불명의 발신인은 말을 이었다.

[직접 뵙거든 그때 알려드리죠.]
“직접 보신다고요? 잠시만요, 이렇게 나오시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아림 씨, 목소리가 커요. 지금은 말싸움할 때도 아니고요.]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말문이 막힌다. 이 사람은 누구이며, 이게 대체 어찌 되어 가는 일인가.

[정 그러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도 간단히 답해 드릴게요.]

아림이 아무 말도 내놓지 못하자 상대방이 다시 입을 열었다.

[1999년 가을에 아마 집에서 저를 한 번 보았을 겁니다. 아림 씨 둘째 숙부와 함께요.]

순간 뇌리에 선명히 되살아난, 재호가 그토록 빼닮은 누군가의 모습.

아림은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마, 말도 안……어, 어떻게……?”

겨우 밖으로 나온 아림의 목소리는 떨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마저 드리지요.]
“왜……왜 저한테 연락을.”
[지금, 그 아이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림 씨밖에 없어요.]

여성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통화가 끝나면, 이 발신 번호로 약속 장소와 일시가 적힌 문자가 갈 거예요. 내일 이 시각에 동일한 번호로 저희 쪽 사람이 확인 전화를 드릴 겁니다. 일시는 변경할 수 없어요. 비밀 엄수 명심하시고, 응하라고 강요하진 않겠지만, 그 아이의 생사가 달린 긴박한 상황임은 알아 두시길.]

재호의 생사.

그 의미를 묻기도 전에 통화는 끝났다.



[이하는 PR 노출용으로 추가된 유료 콘텐츠입니다. 결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구매하면 포스트의 나머지를 볼 수 있습니다.
  • 텍스트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