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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 지문 없는 손가락과 검지 않은 눈동자

글감 '지문'의 판타지 단편. 2017년 11월에 첫 공개.

'지문이 없는 손가락은 마녀의 증표다'




‘지구’라 불리는 수많은 별 중 하나의 이야기




16세기 유럽, 어느 나라 어느 마을에 홀로 사는 여성이 있었다.

젊디젊은 용모가 무색하게 박식하고 현명한 여성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홀연히 마을에 정착해 마을 사람들을 온갖 질병에서 구했다. 그 나라 수도의 용하다는 명의도 치료하지 못할 중병도 이 여성 앞에서는 눈 녹듯이 자취를 감추었고, 갖은 질병의 창궐이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에 떨게 만들던 시대에 이 마을 사람들은 건강한 몸과 자유로운 마음으로 평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여성이 마을에 나타난 지 10년쯤 되던 때, 마을에 유래 없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돌았다.

주민들이 하나 둘 고통스럽게 앓다 처참히 죽어 갔다. 병자들의 악취가 집집에서 넘쳐 거리를 맴돌고, 장례를 치를 겨를도 없는 시신들이 하루가 머다하고 불태워졌다. 10년 동안의 평온이라고는 온데간데없이 석 달째 죽음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마을에 언제부터인가 소문 하나가 전염병처럼 돌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마녀다.

마녀가 아니고서는 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리도 없고, 우리를 갖가지 병에서 쉽게 구해낼 수 있었을 리도 없으며, 우리가 지금 이렇게 죽도록 내버려 둘 리도 없다. 이 병은 저 마녀가 때를 기다린 끝에 부린 술수다.

지문이 없는 손가락은 마녀의 증표다.

저 여자의 손끝을 증거로 확보해 온 마을에 보이자. 손가락에 지문이 없는 여자를 불태우면 마을은 병에서 구원받는다.

마녀를 죽이자.

그러나 마녀의 존재가 차츰 신빙성을 잃기 시작한 그 시기, 10년 사이에 수많은 주민들의 선망을 얻은 이를 간단하게 마녀로 몰아 제거할 수는 없었다. 마을을 습격한 맹수에게 맞서다 치명상을 입었던 아버지들도, 산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새 생명과 함께 무사히 살아난 어머니들도, 맺어지기도 전에 질병으로 사별할 뻔했던 부부들도, 어린 몸에 닥친 고열과 호흡 곤란의 고비를 무사히 넘긴 아이들도, 당연한 줄만 알았던 죽음이 아니라 손자 손녀의 웃음과 성장을 몇 해라도 더 마주할 수 있게 된 노인들도, 모두 정체 모를 이 여성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소문을 퍼뜨린 마을 대표들은 한 세기 전부터 이 마을 근처의 성스러운 숲, 검은물푸레나무의 군락에 은둔하고 있는 현자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마치 그간 살아 온 세월의 방대함을 감추듯 얼굴의 위쪽 절반을 후드의 그늘에 가린 그 남성은 마을 대표들의 요구를 듣고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자신 앞에 모여 음험한 기대로 눈을 번득이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지침을 구두로 내리고서 현자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앞으로 태양이 세 번 뜨고 세 번 진 뒤면, 당신들이 원하는 마을의 평화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마을의 대표들이 물러가고 모두가 깊이 잠든 그날 밤, 현자는 오래 알던 집인 양 처음으로 여성의 거처를 남몰래 찾았다.

"이틀 안에 이곳에서 떠나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아직 떠날 수 없습니다. 사나흘 뒤에 완성될 약이면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치유되든 말든, 저들은 당신을 모욕하고 죽이려 들 겁니다. 소문의 진원이 원하는 것은 주민들의 치유가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저를 믿어 준 사람들을 죽음 앞에 버려 둘 순 없어요."

현자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손끝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여성은 망설이다 양손을 펴 현자에게 내밀었다.

"……어째서, '인간의 육체를 지닌 혼'인 당신이……."
"혼의 선조들의 지식과 능력으로도 인간의 육체를 좀먹는 질병은 퇴치하기 어려우니까요. 질병에서 사람들을 구하며 평생을 살기로 결심한 이상, 제약을 거듭하다 손끝이 닳는 정도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수고조차……이대로라면 약이 완성되기도 전에 허사가 될 겁니다. 더구나, 원래는 당신들도……."
"인간의 일을 지켜보되 그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이죠?"

여성의 어조에는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현자는 말문이 턱 막혔다.

"혼의 선조들의 가르침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그것을 알면서 지키지 않은 대가인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지금 도주하면 당장 제 목숨은 보전해도, 결국 저는 남은 200년을 다 살기도 전에 언젠가 어딘가에서 같은 실패를 겪고 같은 이유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마녀 사냥은 이 대륙 어디에나 존재하니까요."

그러면 전부 그만두고 당신의 본분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는가. 강자의 권력을 위해 약자와 혐오의 대상을 만들어 제물로 삼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인간들 따위에게 깊이 개입해 봤자—

그 말을 현자는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저는……이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인간들을 죽음으로부터 지키는 일을……. 당신은……이런 절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성은 창밖을 향하여 몸을 돌리고서 물음인지 혼잣말일지 모를 말을 덧붙였다.

"이건……'인간의 육체'를 지닌 자의 숙명인 걸까요?"

이쪽으로 등을 돌린 여성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현자는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감지했다.

왔을 때처럼 아무도 모르게 현자가 떠나간 뒤, 태양이 세 번 뜨고 세 번 졌다.

밤이 깊어 하나 둘 불이 꺼져도, 마을 외곽의 작은 집 창문에는 변함없이 불이 밝았다.

그 집의 문이 열리고, 10년 동안 마을 사람들을 지켜 온 여성이 조심스레 앞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잠깐만, 아주 잠깐만 바깥 공기를 쐬는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집들의 등은 꺼졌고, 주위에는 어렴풋한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했다. 약속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여성은 시계가 없이도 알았다.

못 버리는 미련처럼 밤 풍경에 눈길을 두다 이제 마무리를 지을 생각으로 몸을 돌린 때였다.

"선생님."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조수로서 진료를 돕는 마을 처녀가 마당 앞에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이 시간에, ……!!"

무슨 일로 벌써 도착했느냐고 다 묻기도 전에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여 육박해 왔다. 곧이어 눈앞에 여러 횃불이 밝았다.

무어라 따질 여유도 없이 마을의 장정 세 명이 다가와 여성을 단숨에 포박해서는 강제로 끌고 마당을 나섰다. 끌려가는 와중에 여성의 눈에 언뜻 비친 것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들지 못하는 조수, 그리고 그녀와 함께 완성된 약을 거두러 오기로 약속한 청년의 어두운 표정이었다.

배신도 재판도 죄다 예측하고 각오했건만 막상 전부 현실이 되어 닥치자 여성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에 몸이 굳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최소 수십 명의 인간들을 어떻게든 제압하고 피신해야 하는가. 하지만 이 상황에서의 어설픈 도주는 곧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를 뒷받침하는 증거다. 그렇게 도주가 실패하면 애써 만든 치료약의 행방도 통제할 수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여성은 마을 광장으로 끌려와 그 한복판, 장작이 한가득 쌓인 지점 옆에 내팽개쳐졌다. 불로 태우면 그 불길이 마녀의 육체는 물론 영혼에도 극심한 고통을 안기고 끝내는 마녀를 영혼째 태워 죽이고 만다는 검은물푸레나무의 장작 더미. 그것과 여성을 에워싸고, 한밤을 낮처럼 밝히는 수십 검은물푸레나무 횃불의 불빛을 받아, 질병의 고통에 지친 수천 명의 사람들과 명령에 따라 착실히 외적과 범죄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병사들과 마을 주민들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마을 대표들의 얼굴이 번들거렸다.

불빛 속의 일그러진 얼굴들만큼 어지러운, 그 얼굴들 아래 혼들의 행방 모를 증오와 공포, 탐욕의 웅성거림에 여성은 귀를 막고 싶어졌다.

"여러분, 이 여자를 보십시오!"

웅성거리는 육성들 사이를 마을 대표 위원회 대변인의 높고 날카로운 외침이 갈랐다.

"여기, 우리 마을의 안녕을 사악한 주술로 어지럽힌 마녀가 있습니다!"

'마녀'라는 말에 군중은 새로이 웅성거렸다.

"이 여자는 악마와 짜고 10년 동안이나 간사한 술수로 선량한 주민 여러분의 환심을 사며 이때만을 노렸습니다. 여러분의 경계심을 흩뜨려 지금처럼 사람을 죽이는 주술이 효과적으로 듣도록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감쪽같이 속은 겁니다!"

한 영혼이 그간 들인 노력과 헌신을 좋을 대로 곡해해 광장 사방에 쩌렁쩌렁 울리게 외치는 목소리에 웅성거림은 한층 사납고 혼란스럽게 변했다.

"어떻게 선생님 같은 분이 마녀라는 거죠? 우리 가족과 이웃을 애써서 구하고 살핀 분을 무슨 근거로 마녀라고 주장하시는 거냐고요!?"

어느 아낙의 외침이 동요로 떨렸다.

"당신도 마녀랑 한패요? 까막눈인 내가 봐도 이 여자가 치료법이라며 쓴 술수 중에 의사들이 쓰는 의술이랑 비슷한 게 뭐가 있는지 의심스럽더만!"

다른 편에서 중년 남성 하나가 불안에 찬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들의 발언에 뒤이어 여러 거칠고 날카로운 주장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꼼짝하지 않고 있는 여성을 앞에 두고 마을 위를 난도질하듯 오갔다.

"조용! 조용히 하시오!!"

대변인이 다시 크게 외쳐 말다툼을 중단시켰다.

"우리 조상들은 선량한 사람들에게서 마녀를 골라내 축출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이 여자처럼 10년이 지나도 어디 하나 변하지 않는 외모를 눈여겨보는 간편한 방식부터, 물에 빠뜨려 수면에 떠오르는지 확인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그 중에서도 가장 깔끔하고 확실한 방법은, 손끝을 확인하는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저편에서 마을 위원회의 구성원 몇몇이 하얀 종이와 지장을 들고 광장 한가운데로 다가왔다.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손끝에 지문이 있지만, 마녀의 손끝에는 지문이 없다!"

'지문이 없다'는 말에 또 다른 술렁임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하게 일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똑똑히 확인시키기 위해, 이렇게 대낮처럼 불을 밝혔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눈앞에 훤히 드러날 겁니다. 눈에 띄지 않는 차이라고 뻔뻔하게 숨기고 우리 마을을 어지럽힌 마녀의 실체가!"

병사 둘이 여성을 옭아맨 포승을 풀고는 양팔을 하나씩 붙잡아 종이와 지장 앞으로 끌고 갔다. 그들 중 하나가 손목을 끌어 지장에 가져간 때였다.

"잠깐, 멈추시오!"

어느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광장의 군중을 스쳤다. 주민과 대표들, 그 외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1년에 한 번, 마을의 중요한 연례 행사 때에나 모습을 보일까말까한, 과묵한 은둔의 현자가 모두의 눈에 익은 로브를 쓴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수천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현자는 걸어와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광장 한가운데의 장작 앞에 서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여성은 여러분과 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마녀로 모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현자님,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연설에 열을 올렸던 대변인이 별 황당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따져 물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인지 도통 애매한 한 마디를 현자는 차분하지만 모두에게 들릴 목소리로 전했다.

"여러분이 찾는 마녀는, 저입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동요의 목소리를 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제가, 마녀입니다."

동요가 한층 혼란스러워졌다. 그 혼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현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붙잡아 온 이 여성은 한 달 반 전, 여러분을 미증유의 전염병에서 구할 방도를 묻기 위해 아무도 몰래 저를 찾았습니다. 저는 그때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었고, 이 여성은 의술을 아는 자로서 그 조언을 충분히 소화해 충실히 따랐을 겁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허사였겠지요. 아니,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을 겁니다. 이 전염병은 제가 마을에 건 주술이고, 그때의 조언은 학자들의 눈에만 그럴싸하지 실은 그 주술의 효력을 강화하는 방안이었으니 말입니다."

광장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외쳤다.

"그게 다 사실이라고요? 현자님이……현자라는 분이, 왜 그런 짓을?"

순간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를 중심으로 실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와 사람들에게 퍼졌다.

"재미있으니까. 인간들의 고통이."

차가운 목소리가 혼에 직접 닿는 그 기운과 더불어 사람들의 혼을 오싹케 했다.

"그렇지만 이제 재미없게 되었습니다."

곧장 무서울 정도로 온화해진 목소리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 인간들은, 다른 가능성은 따져 보지도 않고서 어리석게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타지 출신의 조금 영리한 여성 인간을 마녀로 지목했으니 말입니다. 제 걸작을 향한 찬사를 한낱 제게 휘말린 인간이 받는다니, 재미없죠."

'그만……그만해요…….'

모두가 얼어붙은 가운데, 여성은 입술조차 섣불리 달싹하지 못하고 그저 혼으로 되뇌었다.

"'마녀의 손끝에는 지문이 없다'. 인간의 관찰력은 실로 놀랍습니다. 집념과 만나면 특히."

현자는 마을 대표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의 조상들께선 그보다 더 깔끔하고 확실한 방안은 전수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사람들이 다시 낮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녀의 눈동자는, 검지 않다. 바로 이것입니다."

군중의 웅성거림에 명백한 동요가 비쳤다. 여성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왜……왜 그런 말을 하는 거에요!? 당신은……!!

현자와 몇 미터 떨어진 자리에서 여성은 온 힘을 다해 혼으로 외쳤다. 분명히 혼에 들렸을 그 외침에 현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서 확인시켜 드리죠."

침착한 어조로 단지 그렇게 말하고서, 현자는 수천의 군중 앞에서 천천히 후드를 벗어 뒤로 넘겼다.

마을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맨얼굴을 드러낸 현자는 마을 대표들을 포함하여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 선 이들에게 먼저 천천히 그 얼굴을 보였다.

"누……누, 눈이!!"

맨 먼저 현자의 얼굴을 본 이들 중 몇몇이 경악에 찬 목소리를 냈다.

대낮처럼 밝힌 불에 비친 현자의 두 눈은 마치 터키석 같은 색을 띠었고, 눈동자라 부를 법한 가운데 부분은 그 청록색이 유난히 짙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도 금발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도 생소한 색을 띠었고, 앞머리는 그 색채 사이에 섞인 은빛 윤기로 빛났다.

게다가 현자의 얼굴은 그가 마을 저 밖에서 은둔한 시간조차도 무색하게 젊고, 이 장소의 불온하고 잔혹한 분위기는 물론 그 스스로가 방금 전까지 늘어놓은 악의적인 발언들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인간이……아니야……."

너도 나도 이 뜻밖의 전개를 두 눈으로 확인하려고 제각기 제멋대로 중앙으로 몰려들어 소란이 벌어지는 가운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떨었다.

'인간이 아니다'라는 표현이 이 시대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자라 불리던 이 '청년'은 저 목소리가 뜻하는, 인간들이 권력과 착취, 탐욕을 위해 멋대로 지어낸 마녀 따위가 아니다.

모든 세계의 조화를 살피는 파수꾼, '혼의 선조의 후예'. 그 혼들 중 하나임을 여성은 현자를 처음 직접 보았을 때 알았다.

'당신이, 그대로의 '모습'을 이 상황에 드러낸다는 건…….'

혼란과 분노에 휩싸인 이 인간들도 저 장작 더미도 피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영혼이 찢어질 것만 같은 안타까움과 회한이 밀려왔다.

"아직도 의심이 가신다면, 제 지문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예상하시는 결과가……."
"그만, 그만!!"

벌어진 입을 여태 다물지 못하던 대변인이 황급히 팔을 크게 흔들며 외쳤다.

"다들, 조용히!!"

대표들과 병사들의 몸짓과 목소리에 소동이 겨우 가라앉았다. 이 자리의 인간들이 정체를 알 리 없는 '청년'을 가운데에 두고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위원장이 원 한가운데로 걸어나왔다. 끌려온 여성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걸어와 자신보다 한 뼘은 큰 눈앞의 인물을 지그시 노려보던 위원장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겠군."

이 자리에 모인 자들에게 똑똑히 들리도록 으르렁거리고서 위원장은 몸을 돌렸다.

인간과 흡사하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를 둘러싸고 사람들은 누구 하나 섣불리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수십 횃불이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원 안은 누군가 한 사람이 손가락 한 번 까닥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폭발해 큰불이 일 듯한 공기로 가득했다.

소리 없이 부풀던 그 공기는 어느 순간 터졌다.

마을 주민 하나가 현자를 세게 밀쳤다. 손가락 하나보다 커다란 팔의 움직임을 신호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폭력적인 몸짓과 광분의 욕설이 원의 한가운데로 집중된 광장은 순식간에 지옥처럼 변했다.

"선생님, 괜찮아요!?"
"자, 이리로!"

그나마 평정을 붙들고 있던 주민 몇몇이 아수라장 속에서 겨우 몸을 피하고 있던 여성을 구석으로 끌어냈다. 그들조차도 얼마 가지 않아 광장 전체에서 불타는 광기에 전염된 듯이 여성을 내버려 두고 폭거에 합류했다.

"마녀! 악마의 자식!"
"죽어, 뒈져 버려!!"

온갖 저주의 욕설이 섞인 발길과 주먹질과 매질을 고스란히 현자에게로 향하고 있는 광경을 여성은 중단시키지도 내버려 두고 도망치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떨며 바라볼 뿐이었다. 그 사이에 병사와 주민 몇몇이 현자를 붙들어 장작 더미 위에 세웠다.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머리는 흐트러지고 옷은 이리저리 찢긴 그 몸 어디에도 핏자국이나 멍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눈에 기묘하게 비칠 수밖에 없는 그 깨끗함이 마을 사람들의 광란을 부채질했다.

"태워라! 태워 없애!!"

저 신성한 나무의 불만 있으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눈앞의 마녀를 태워 완전히 죽일 수 있다는 듯이 사람들은 외쳐댔다. 현자의 몸이 그대로 새까만 장작 한가운데에 선 새까만 기둥에 묶이고, 그 위로 기름이 부어졌다. 남자 몇 명이 불이 붙여진 나무 막대를 들고 성난 군중 사이를 넓게 가르며 검은물푸레나무 장작 더미로 성큼성큼 향했다.

여성의 가슴속은 절망에 휩싸였다.

마녀를 혼까지 태워 없앤다는 검은물푸레나무의 불길과 그 연소의 부산물은 혼을 가진 모든 생명의 혼에 치명적이다. 여태 불태워져 혼까지 고통받으며 죽어 간 마녀들은 그저 인간일 뿐이니, 당연히 모든 인간들의 혼에 위험하다.

이제 피어오를 불길과 연기, 재에 타격을 입는다는 점은 '혼의 선조의 후예'들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피해에 인간보다 훨씬 내구력이 높을 뿐, 그것이 유해하고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더는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다. 여성은 질끈 눈을 감았다.

——도망치세요.

혼탁하게 타오르는 광기와 타들어가는 절망의 틈새를 뚫고 혼의 목소리가 여성의 혼에 닿았다. 여성은 눈을 뜨고 음성이 들려온 쪽을 향했다. 맞고 짓밟히고도 여전히 고요한 혼의 표정은 바로 앞에 있는 모습처럼 선명히 보였다.

——떠나세요. 무사히 살아 계시는 겁니다.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널리 펼 그 날까지…….

하지만, 당신은—

혼의 온화한 부탁에 여성은 그렇게 반문할 수가 없었다.

불은 이미 검고 검은 장작에 붙여져 순식간에 타올랐다.

저 어진 혼을 위해서도, 이 하찮고 비겁한 혼을 위해서도, 자신은 더 이상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비틀비틀 일어서는 여성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 떨어졌다.

한 명도 빠짐없이 현자를 향하여 미친 듯이 소리치고 저주를 퍼붓는 인간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 이 모두를 고스란히 마주하는 현자를 뒤로 하고 여성은 지체 없이 광장 밖으로 달렸다.

여성의 모습이 광장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혼을 먹는 불은 기둥에 묶인 현자에게로 옮겨붙었다.

"……왜, 불길이 시원찮은 거야? 저 녀석은……왜 저리 멀쩡하고!?”

이제는 사악한 혼을 먹이로 삼아 한층 기세 좋게 날름거려야 할 불길이 몇 분이 지나도록 영 시원찮은 것은 물론이고 사형수도 표정만을 일그러뜨린 채 아무 고통의 몸부림도 보이지 않자, 대표 하나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장작, 장작을 더 가져와라! 기름도!"

다른 대표가 급하게 소리쳤다.

곧 장작과 기름 단지가 날라져 왔다. 검은 장작은 불타는 나뭇더미에 던져지고, 그 위로 기름이 부어졌다.

그러기를 몇 차례, 화형대를 중심으로 피어오르던 연기는 차츰 광장 전체에 자욱해져 갔다.

이 광경을 한시라도 뒤돌아볼 새도 없이, 여성은 심야의 새까만 숲을 달리고 또 달렸다. 살아남기 위해. 겨우 혼자만의 힘으로 등 뒤의 상황을 전부 되돌릴 엄두는 차마 내지 못한 채, 두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몇 번이고 훔치며.

‘미안……미안해요…….’

무고한 혼 하나의 희생. 그 혼이 간섭의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감행하고 있을지도 모를 보다 거대한 참극. 여성도 후자의 가능성을 감지하지 못한 바는 아니다.

어느 쪽도, 자신의 어리석음 탓이다.

주춤한 여성은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렸다. 또 한 줄기 눈물이 눈에서 흘렀다.





‘성스러운 숲’ 인근의 마을에서 마녀 처형이 자행된 지 사흘 후 아침.

마을 곳곳에는 검은물푸레나무의 탄내가 엷게 섞인 공기가 유령처럼 감돌았다.

1만 명 가량의 인간이 거주하던 마을에 인적은 없었다. 그저 제각각 눕거나 쓰러진 남녀노소 인간들의 시신만이 집집마다, 거리에 드문드문 방치되어 있었다.

특히 마을 광장에는 타서 거의 사라진 장작 더미를 중심으로 수천의 인간들이 쓰러져 죽어 있었다.

집 안에 죽은 자들은 대부분이 노인과 어린이, 어린이의 어머니였고, 실외에서 죽은 자들의 대다수는 청년과 중장년층이었다. 바깥의 시신들은 쓰러진 방향으로 보아 광장을 빠져나가 되도록 광장에서 멀어지려던 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들 1만 구 안팎 인간의 공통점은 모두가 혼이 죽어 육체도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다른 어느 인간이든 한 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혼이 타 우그러지는 감각에 몸서리칠 법한, 끔찍한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죽어 있었다.

이것이 지구-카르타스테에서 연구를 진행 중이던 동족이 검은물푸레나무의 불에 중상을 입은 사건을 조사하러 현장에 파견된 이스프리들이 목격한 그 마을의 최후였다.







피고는 초계 절대시 n32q년 253일 경, 지구-카르타스테 좌표 S104aft.Lpw5614 상의 주민 12597인의 혼을 대상으로 연소 중의 검은물푸레나무에 대한 혼의 내구성 차이를 이용하여 고의로 피해를 입히고 이들 전원의 영혼사(靈魂死)를 초래한 바, ‘아즈’로서 비간섭의 원칙을 지역 사회 하나의 몰살이라는 대규모 살혼(殺魂)의 형태로 침해한 죄의 중함을 엄중히 물어야 할 것이나, 피고가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의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현재 피고의 부상이 심각한 상태이며, 행위의 직접적인 동기가 무고하게 ‘마녀 재판’에 처해진 이스프리 포제의 구출이라는 점, 화형 유도가 인혼(人魂)의 치사량에 달하는 검은물푸레나무 연소 유도를 의도한 행위라는 증거가 부재함을 참작하여 격리 요양과 70년의 근신에 처한다.

—인간이 이해 가능한 형태로 변환된 n32q토6a7 판결문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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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씀[ 잊혀지다
#17
설정 절도 용의자의 유보된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