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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날개자리의 흰날개성운 2

작은 낙원을 지키던 소년과 소년을 지키던 소녀의 이야기
검은날개자리의 흰날개성운



2. 붉은 달 아래에서



“적월식이 1년 만에 재개된 원인을, 재개 두 달 만인 오늘 한 달 만에 다시 모인 여러분 중 아무도 찾지 못했다, 이겁니까?”

금빛 메달을 목에 건 노년의 백발 남성이 위원회 회의실에 모인 일동을 향하여 엄숙하게 물은 때, 대신전의 휘장을 몸에 건 초로의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짐짓 점잖게 입을 열었다.

“재개되었다니요. 위원장님, 어휘의 선택은 확실히 하셔야지요. 엄정한 기록에도 남아 있는 바, 지난 해의 ‘승천’은 적정자가 참여해 한 치 오차도 없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대신관장, 지금 이게 각개의 잘잘못을 따지는 자리입니까? 적월식의 주기가 16년 만에 다시 불안정해진 원인과 그 대응책을 찾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줄 잘 아실 텐데요.”

은빛 로브를 두른 중년의 여성 크샤앤나가 못마땅한 기색을 얼굴에 슬쩍 드러내며 이의를 표했다.

“은익(銀翼)의 말씀대로요. 대신관님, 어디 한번 지금 이라를 대동하고 필란테 중앙 광장으로 나서서 방금 전처럼 시민들에게 말씀해 보시지요?”
“그게 지금 시장으로서 할 말씀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몸집 크고 혈색 좋은, 은익보다는 나이들어 보이고 대신관장보다는 젊어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성이 빈정대며 대신관장과 아이레에게 곁눈질을 하자 대신관은 펄쩍 뛰었다.

이라로 대표되는 낙원의 거대한 신통력을 받들며 수호하는 대신전의 수장. 그 낙원 전 지역을 연결하는 위원회의 수장. 낙원의 중심지인 필란테의 시장. 크샤앤나의 전통을 대대로 보존하는 크샤앤나 집단 ‘백은천로’의 수장. 낙원에서도 으뜸가는 지위의 어른들 사이에 오가는 말에 선 날은 아이레의 마음을 불안케 했다. 1년에 여섯 번 열리는 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지난 해에 열다섯 살이 되고서부터 오늘까지 겨우 세 번이지만, 오늘은 하나같이 지난 두 번에 비해 마음이 거칠어져 있다.

지난 주에 중앙 광장에서 마주했던 ‘낙원’의 군중이 그러했듯이.

“침착성을 찾으시지요, 귀하신 분들이여.”

점잖게, 그러나 모두에게 들리도록 한 마디 한 이는 위원장이 아니라, 안경을 쓰고 천문연구소 임원의 가운을 걸친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자줏빛 단발의 중년 여성이었다.

“달은 붉고, 주민들의 마음은 낙원을 잊어 가고 있습니다. 다음 ‘승천’에 적정한 자를 최종적으로 선별할 수 있는 시기는 일러야 10개월 뒤겠지요. 그렇다면…….”

여성은 말을 늦추며 깍지 낀 양손을 테이블 위에 놓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우선 ‘미봉책’이나마 동원해야겠지요. 주민들은 안정적인 마음을 되찾아 한 달, 길면 두 달은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사이에 달을 하얗게 되돌려 다음 ‘승천’ 이전까지는 적월식의 재발을 막을 방안을 계속해서 침착하게 물색하는 거죠.”
“‘미봉책’……소장, 적월식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지금 그런 비효율적인 조치가 충분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맞소! 지금 시청 공무원들의 사기를 알고 하는 소리요? 책상을 내리치며 낙원이 멸망한다고 통곡하는 자가 사무실에서는 눈에 안 띄는 게 신기한 판에 그런 걸 예고도 없이 당장 시행하자 그러면…….”
“시장님, 이미 저희 연구원들도 며칠째 저 천문 현상의 조사 및 원인 파악은 고사하고 낮이나 밤이나 하늘만 내다보며 불안에 떠는 상황이군요. 그리고, 은익인 당신이라면 모르는 바 아니겠지요. 이대로라면 조만간 당신의 일족, 동족들도 ‘낙원’이 필요로 하는 그 능력에 영향을 받을 겁니다……다음 ‘승천’의 훨씬 이전에.”

덤덤히 말을 늘어놓은 천문연구소장을 시장과 은익은 복잡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들여보다 각자 시선을 거두었다.

이 자리에 모인 어른들이 긴장 속에서 공유하고 있는 ‘미봉책’의 의미를 아이레로서는 추측도 할 수 없었다. ‘승천’이 실패하는 불상사가 생길 경우 동원하는 임시방편이라고 어릴 적부터 대신관장과 스승들에게 들었지만, 그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라의 사명 밖의 일’이라며 함구했고, 대신전의 높은 직책을 맡은 자로서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자료도 그런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봉책’이라 불리는 그것이 본디 낙원의 주민들에게 이롭기만 하지는 않은 일임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갔다.

‘낙원의 주민들에게 이롭지만은 않다’고 생각한 순간, 6년도 더 전의 밤, 천문대 지하의 어느 공간에서 날개를 뽑힌 채 피를 흘리며 죽어 가던 누군가가 다시 한 번 뇌리에 떠올라 날개 끝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이 정도까지 축적된 불안과 공포가 완화되지 않고서는 낙원에의 믿음도…….”
“잠시만요.”

대신관장이 혼잣말처럼 동의를 표한 때 아이레가 목소리를 냈다. 작년부터 오늘까지 겨우 세 번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 조각상처럼 얌전히 자리를 지키던 소년에게 일동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미봉책’……을 실행해야 할 만큼 긴박한 상황인 줄은 압니다만.”

당신들이 논하는 ‘미봉책’이 무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은 자신에게 쏠린 어른들의 말없는 눈길 앞에서 주춤했다. 그 마음을 버리고 아이레는 결론으로 건너뛰었다.

“큰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애초에 그것을 실행하기도 지금의 주민들에겐 어렵다면, 지금 대신전과 위원회가 지원하고 있는 치료술의 횟수와 대상을 늘리는 편이 사람들을 돕기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회복술에 드는 재료가, ‘깃털모래’가 더 필요하다면, 제가…….”
“크샤앤나의 깃털갈이 1회에 소모되는 힘이 만만치 않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라여.”

말은 끝을 맺기도 전에 은익에게 가로막혔다.

“치료술은 낙원에 사는 우리의 마음을 달래지만, 당신의 힘은 우리가 사는 낙원을 지탱합니다.”

옆자리에 앉은 대신관장도 타이르듯 조용히 한 마디 하고는 말씨에 힘을 더했다.

“적월식이 두 달이나 지속되는 지금, 낙원이 이 정도나마 건재할 수 있는 건 당신의 힘이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힘을 정해진 횟수를 초과한 간이정신치료술에 낭비할 때가 아니지요.”
“그렇지요. 몸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게 좋습니다.”

넌지시 말을 던지는 천문연구소장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그렇지만’이라는 말도 내놓지 못하고 당황한 눈빛도 감추지 못하던 아이레는 새삼 이 여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기로는 대신관을 포함한 이 자리의 어른들 중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이 천문연구소장은 어딘가 달랐다. 학력과 직책에 걸맞게 지적이고 박식하며 냉정과 침착을 쉽게 잃지 않지만, 꿍꿍이가 있는 듯이 냉혹했다. 꿍꿍이가 있는 듯한 냉혹함이란 달리 말해, 직접적으로 누구를 해하는 일은 없으되 이처럼 한 자리에 모인 낙원의 중역들을 상대로 ‘난 너희도 모르는 너희의 약점까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구태여 감추지 않는 냉혹함이었다.

아이레의 석연치 않은 마음 따위 알 리도 없고 몰라도 손해볼 것 없는 시장은 저기서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회의실에서 오가는 말들을 가만히 듣던 위원장이 다시 입을 떼었다.

“한 달 뒤로 예비된 연중 사업, 여러분도 알고 있을 터.”

그렇게 운을 떼고서 위원장은 단호하게 다음 말을 내놓았다.

“한 달을 기다리기는 시급합니다. 가능하면 일주일 뒤로 당겨 볼 것을 제안하지요.”





회의가 있고서 일주일 후, 밤이면 여전히 붉은 달을 맞이하는 필란테와 낙원의 다섯 소도시에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정기 신체검사가 시작되었다.

‘정기’ 신체검사라지만 본래 일정보다 약 한 달은 앞당겨진 신체검사를, 한 달은 넘게 붉은 빛인 달 아래에서 마음이 불안하고 어수선해진 주민들은 순순히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신장과 체중 측정, 혈액 채취, 크샤앤나 주민의 깃털 샘플 채취만으로 간략하게 구성된 이번 신체검사는 예년과 달리 의무적이었고, 징벌적이었다.

예년 같으면 자발적으로 신체검사에 참여해 작은 혜택을 기분 좋게 받아 가던 주민들은 이번에는 신체검사에 응하지 않으면 유료, 무료 할 것 없이 간이정신치료술 이용이 전적으로 금지된다는 느닷없는 강제성에 투덜거리며 의원을 향했다.

신체검사는 대신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도 한 차례 시행되었다.

“……아이레.”

대신전 내 신체검사가 끝난 날, 해가 지고 달이 뜰 무렵에 아이레의 방을 찾은 크리스타는 깜짝 놀라 재빨리 아이레에게 달려갔다. 창가에 웅크리고 앉은 아이레의 곁에 앉아 손을 잡고 물었다.

「안색이 안 좋아. 힘든 일 있어?」

아이레는 음성으로도 마음으로도 한동안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크리스타.」

마침내 마음에 전해진 목소리는 무거웠다.

「‘달은 하루도 하얀 적이 없었다’는 말, 신전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크리스타는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깜짝 놀랐다.

「아무도 그런 얘기 안 하던데? 왜, 누가……신관장님이 뭐라고 했어?」
「아니.」

잠시 대화가 끊겼다. 둘 사이로 저녁 바람이 살랑였다. 아이레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의 진의를 어렴풋이 파악하고 느낀 서운함을 크리스타는 굳이 표현하지 않았다.

이타라로서 교육받으며 어른들에게 들은 자신의 의무에는 이라의 속마음 중 낙원의 질서와 규범에 어긋나는 것을 대신관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는 이라의 자리에 있는 자에게는 비밀이었다. 그 비밀을 아이레는 막연히나마 감지하고 있는 듯했다. 크리스타는 아이레의 가장 깊숙한 속마음 어느 하나도 지금까지 보고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어쩌다 보고하는 내용은 기껏해야 아이레가 대신관님에게 훈계 몇 마디나 듣고 끝나리라 생각되는 수준의 극히 사소한 일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신전에서 십수 년의 대부분을 보낸 크리스타에게는 신전의 어른들이 매일같이 말하는 세계보다 아이레가 보고 느끼는 세계가 훨씬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대신전’과 ‘아이레’로 양분된 이 세계를 살면서 체득한 확신이었다.

「너는……어떠니? 지금도 내 곁에서 보는 달이 시가지의 달보다 붉어?」

한참 뒤에 들린 아이레의 마음의 음성은 조금 떨렸다. 크리스타는 창밖을 올려다보고, 다시 아이레를 향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그치만 둘 다 안 무서워.」

그 말을 들은 아이레는 안도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안해. 몰라도 좋았을 걸……나조차도 다 알지 못하는 걸, 너까지 알게 만들어서.」
「아냐, 그렇지 않아!」

크리스타는 속으로 펄쩍 뛰고는 아이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이레는 남들이 못 보는 사실을 볼 수 있는 것뿐이고, 네가 볼 수 있으니까 나도 볼 수 있는 거고, 단지 그뿐이잖아? 아이레가 보는 걸 말로 알려도 모른 척하는 어른들이 바보인 거야!」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크리스타는 과격하게 직설적으로 내뱉었다. 조금 당황해 눈길도 거두지 못하고 있자 아이레가 빙긋 웃었다.

「……고마워.」

두 사람은 한참 서로를 바라보았다.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저 하늘 위에는 붉은 달이 높이 떠올라 있었다.

‘적월식’이라 불리는 현상은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한창에 이르러 하얀 달을 만인의 눈에 주황빛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 빛깔은 아이레와 아이레 곁에 붙어 있을 때의 크리스타의 눈에 십수 년씩이나 들어오던 빛깔이었다.

지금, 두 사람의 눈에 비치는 달은 피처럼 붉게 빛났다.

「……아이레.」

붉은 달을 올려다보다 크리스타는 마음을 굳히고 의문형으로 혼잣말을 했다.

「백익루경……낙원 밖에 정말로 있을까?」
「……그건…….」

아이레가 흠칫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나도, 기대하진 않아……. ‘여기서 크샨나 반 바퀴만큼 거리에 백익루경이 있더라’라고, 바람의 정령에게 얼핏 들었을 뿐이니까…….」
「그치만……자연은 근거 없는 이야기나 거짓말은 안 한다며. 크샨나 반대편에 진짜로 있을 거라고 기대해 봐도 좋지 않아?」

이라. 승천. 백익루경.

대신전의 가르침이 이르길, 크샨나 위에 사람, 즉 인간과 크샤앤나가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환경을 생성해 유지하는 힘의 주된 원천은 이 셋이라 하였다.

그 효력이 유효한 기간은 저마다 달랐다. 이라는 이라로 태어난 크샤앤나의 한평생. 승천은 크리스타도 잘은 모르지만 대강 5년이라는 듯하다.

백익루경이란 현재는 신화와 전설, 기록으로만 그 존재가 전해지는 유기체 결정으로, 소문에 의하면 백익루경의 효력은 1만 년은 지속되며, 낙원을 지키는 그 힘의 위력은 이라와 맞먹을 정도라 한다.

그러나 낙원에 본래의 백익루경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인간, 정확히는 크샤앤나를 구성하는 유기체와 합성된 형태로만 존재해 왔다.

낙원의 어느 누구도 실물을 본 일이 없다는 백익루경은 크샨나 어딘가의 지하에 다량 묻혀 있으며, 아주 먼 옛날 아무도 모르는 어떤 경위로 이 백익루경을 날개 형태의 신체 부위에 포함하게 된 존재가 크샤앤나의 선조로, 그가 현재의 필란테에 해당하는 지역에 인간과 크샤앤나의 삶터를 잡고서 천지의 계시에 따라 자신의 몸의 일부인 백익루경의 효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승천한 것이 승천과 낙원의 시초라고 전해진다.

말하자면 대신전의 가르침이 가리키는 백익루경이란 낙원에 태어나는 크샤앤나들의 하얀 날개고, 그 효능은 순수한 백익루경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레가 보는 달의 빛깔이 모두가 보는 달의 빛깔보다 붉은 것은 어째서이며, 그 빛깔이 최근에 한층 진해진 이유는 무엇이며, 그처럼 진해진 빛깔이 어째서 낙원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아가는지는 모르지만, 혹시라도 백익루경을 이곳으로 가져와 어떻게든 낙원을 유지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강화하는 일에 활용할 수 있다면?

「잠깐 견학 다녀오는 셈치고, 크샨나 반대편에 다녀올 순 없을까?」
「크리스타!?」

이번에는 아이레가 놀랐다.

「낙원 밖은 위험해……너도 알잖아?」
「그치만 나간다고 꼭 죽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면서 크리스타는 자신의 가슴 위에 주먹 하나를 꼭 쥐어 얹었다. 아이레의 백루석은 상의 아래 그 지점에서 타인의 눈에 띄지 않을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 백루석의 힘이 내게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랬지? 난……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믿어.」

아이레는 그 말을 듣고서 반론하지도 못하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크리스타를 뚫어지게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 눈빛을 보며 크리스타는 생각했다.

방금 전 자신의 말은 명백히 자신의 임무와 사명에 위배되며 주제넘는 발언이라고.

그렇지만 아이레는 몇 해 전 바람에게 백익루경의 소재지를 전해 들은 이후로 줄곧 백익루경에 관하여 생각하는 듯했다. 낙원을 비추는 달이 붉어진 요즘에 들어서는 더더욱 절실하게.

게다가 아이레는 낙원에서 자신이 갖는 권한과 영향력에 크게 고뇌하고 있었다. 아이레 자신이 낙원에 끼칠 수 있는 실질적인 영향은 낙원이라는 상태를 유지하는, 자신도 그 원리와 실체를 알지 못하는 선천적인 힘뿐이며 대표회의에서 자신의 발언은 고려의 대상으로 취급되지 않음을 한탄했다.

「……그래. 이대로라면 낙원 사람들은 또 고통에 빠지겠지. 하지만…….」

아이레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 예쁜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아무 말 없이 들여다보며 크리스타는 6년 전부터 가끔 불안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면 불쑥 고개를 내밀던 두려움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자신이 아이레 곁을 조금이라도 멀리, 오랫동안 떠나 있으면 아이레는 그날의 어느 크샤앤나처럼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은 단순히 생을 바쳐 지켜야 하는 고귀한 존재를 수호하는 일에 실패한다는 위기감이 아니다. 이 예쁜 마음도 하얗고 아름다운 용모도 고통 속에서 산산조각나 소멸하리라는 두려움. 손에 쥔 이 따스한 체온이 영영 차갑게 식어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

지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를 지켜 주지 못하고 영원히 잃고 말리라는 두려움은 너무도 아프다. 이라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는다면 그 감정은 낙원 전체를 해칠 것이라고 대신전의 어른들이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도.

그 경고 앞에서 크리스타는 매번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낙원을 지키겠다는 아이레의 마음에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자신들이 이라와 이타라로 만난 영원무궁한 낙원에서 이대로 계속 평생 둘이서 행복하게 낙원을 지키고 싶다는 사적인 감정이 낙원에 독이 된다고?

그렇지만 그 감정이 소중한 만큼, 이 영원무궁해야 할 낙원을 아이레를 두고 제 발로 벗어나는 일은 역시나 상상도 못 할 일이겠다. 대신전에서 시킨대도 못 따를 것 같다.

크리스타는 한숨을 쉬고 아이레의 손을 고쳐 잡았다.

「아이레, 우리, 지금이라도 백익루경에 대해 낙원 안에서라도 알아 볼 만큼 알아보면 어때? 난 당장이라도 백익루경을 찾으러 나가고 싶지만, 역시 널 혼자 둘 순 없으니…….」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이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달은 말 한 마디 없이 붉디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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