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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날개자리의 흰날개성운 3

작은 낙원을 지키던 소년과 소년을 지키던 소녀의 이야기
검은날개자리의 흰날개성운



3. 경고와 습격과 섬광



신체검사가 끝나고서 일주일 뒤, 달의 빛깔은 갑작스런 적월식의 개시 후 1주째 수준으로 옅어졌다.

민심은 아직 불안하고, 필란테 시민들은 여전히 마음의 괴로움을 호소했지만, 그래도 적월식 한 달째부터 신체검사 기간까지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나 대신관은 이 소강상태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내다보았고, 위원회는 적월식이 약화된 날로부터 2주 후면 다시 달이 붉어질 것이라는 천문대의 보고를 대신전과 중앙위원회, 낙원의 각 지방 위원회에 전했다.

“아이레 님, 크리스타 님.”

달의 빛깔이 옅어지고서 다시 일주일 뒤, 일과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대신전의 작은 정원에 마주 앉은 크리스타와 아이레를 젊은 사제 하나가 찾아와 불렀다.

“은익께서 두 분을 뵙고자 청하십니다.”

백은천로(白銀天路)의 수장 정도 위치에 있는 이가 이라만이 아니라 이타라까지 지목해 대면하겠다고 의사를 표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고, 사제를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로 오셨다는지요?”

아이레의 물음에 사제는 조금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중요한 사항이기에, 용무는 두 분께만 말씀드린다 하셨습니다.”

그녀를 따라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운 응접실로 향하였다. 유리벽 바깥의 정원을 배경으로 두고 작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있던 은빛 로브의 여성이 그들을 보고는 일어섰다.

“백은천로의 대표로서 이라를 뵙고 이타라와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은익은 몸을 굽혀 예를 표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두 분께 직접 전할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앉으시지요.”

사제를 내보내고 아이레가 권유했다. 세 사람은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시종이 야간에도 음용 가능한 현상화차(現狀花茶)와 소량의 다과를 내어 놓고 물러갔다.

“오늘 무슨 일로 저희를 찾으셨는지요?”

아이레가 묻자 은익은 아이레와 크리스타에게 한 번씩 잠시 눈길을 향한 뒤 거두고 말을 이었다.

“저희 장서관으로부터 아이레 님 명의의 대출 시도가 있었다는 보고를 받고 두 분께 몇 가지 간단히 조언을 드리고자 자리를 청했습니다.”

순간 두 사람은 표정이 굳을 뻔했다.

“크리스타 양.”

은익은 우선 크리스타 앞으로 무언가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은 닷새 전에 당신이 장서관에서 대출을 요청한 서적의 목록이 틀림없겠지요.”

보아하니 안 읽어도 상황은 이미 뻔하겠지만 크리스타는 종이의 글씨로 시선을 향했다. ‘규정상의 이유로’ 대출이 거부된 서적 세 권과 대출은 허가되었으되 중요도는 그 세 권보다 떨어지는 서적 세 권의 제목이 역시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서적들을 크리스타 양 본인의 명의가 아니라, ‘이라의 대행자로서’ 이라의 명의로 대출하겠다고 한 것도 사실이지요?”
“은익, 이 일은—”

급히 대화에 끼어드는 아이레에게 크리스타는 가만히 손짓을 했다. 그러고는 은익을 똑바로 보았다.

“백은천로 장서관의 대출 규정과 이타라로서의 대행의 권한 범위는 이라와 저 모두 사전에 확인했습니다. 확인한 규정과 권한에 근거해 대출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도서들만을 대출 요청했고요. 접근 가능한 모든 사항을 숙지하고 대출을 시도한 일이 은익께서 몸소 대신전을 방문하시어 조언을 제공하실 만큼 중대한 일인지요?”

크리스타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침착하게 말했다. 은익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크리스타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그 다음으로 아이레를 들여다본 둘을 한눈에 포착하고는 조용히 한숨을 지었다.

한숨을 쉬는 은익은 두 사람이 딱하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규정과 권한을 근거로 거기까지 판단할 수 있다면, 내가 이 자리에 발걸음해 무슨 조언을 내놓을지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테지요.”

그것도 눈치를 못 채면서 큰소리냐는 뉘앙스로 은익은 조용히 답하고서 다시 두 사람을 직시했다.

“조언은 이것뿐입니다. 필시 이 대신전에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겠지요. 이라의 사명은 이 낙원을 지키는 일에 평생 온 마음을 다하는 것. 이타라의 사명은 이라의 그 ‘마음’을 이라의 생명과 더불어 평생 지키는 것.”

그 ‘마음’이라는 단어는 묘하게 강조되어 크리스타와 아이레의 귀에 번해졌다.

“수천 년 전에 기적적으로 탄생한 낙원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고,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지, 그것은 이라와 이타라가 알 일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만큼의 임무와 능력과 지식을 고수하며 각자의 자리를 지킨다는 흔들림 없는 마음가짐, 그것이 영원무궁의 낙원을 원위치에 고정하는 축이지요. 그 축이 있기에 낙원은 지금처럼 일시적으로 흔들리다가도 원위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고요. 하지만.”

은익은 잠시 말을 끊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낙원을 지탱하는 누구의 마음 하나라도 그 마음가짐에서 멀어져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낙원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겠지요. 낙원은 자기 보존의 본성에 따라, 자신이 완전히 길을 잃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그 마음을 낙원에서 추방할 겁니다.”

노을이 스민 응접실 안에 은유적인 긴장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은익은 수 초가 지나도록 아무 말도 내놓지 못하고 자신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두 사람과 시선을 맞부딪다 한숨을 쉬었다.

“아이레 님도 크리스타 양도, 역대 이라와 이타라 중에서도 특히 뛰어날 뿐 아니라 낙원을 지킨다는 사명 또한 굳건한 줄로 압니다. 그 능력과 사명에 걸맞게, 각자에게 주어진 지식의 범위를 고수한다는 의무도 기꺼이 지킬 수 있겠지요.”

은익이 부드럽게 내놓은 말에 크리스타는 멈칫했다.

십수 년을 지켜 온 이 마음은 정말로 낙원을 지킨다는 사명이었나?

낙원을 지킴은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였던가? 그 해답에 해당하는 존재보다 낙원을 자신은 우위에 둘 수 있나?

어떻게 낙원을 그 존재의 우위에 둘 수 있지?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러면서 은익은 소녀와 소년에게 넌지시 시선을 보냈다.

“의무를 벗어난 사적인 정 또한 낙원을 고정하는 축을 뒤흔드는 재액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순간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흠칫했다.

“……은익, 무슨 이유로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거죠?”

아이레가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물었다. 은익은 자신 앞에 놓인 현상화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답했다.

“저는 낙원을 지키는 일인으로서, 낙원을 지키는 누구도 추방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할 뿐입니다.”

그리 답하는 은익에게서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견이 길어졌군요.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마중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은익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별의 바다의 축복이 충만한 밤을.”

몸을 돌려 멀어져 가는 은익의 뒷모습을 두 사람은 불안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천문대가 예보한 일자가 열흘 앞으로 다가온 날의 밤, 별의 언덕에서는 대신전이 주관하는 점성술이 비밀리에 거행되었다. 본디 1440일(주: 크샨나의 공전 주기는 360일)에 한 번, 이라와 대신관 소속 ‘별의 바다의 점술사’, 대신관장과 은익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그 의식에는 언제나 그랬듯 이타라와 대신관 소속의 성기사 10인, 백은천로의 무사 4인이 호위로 따랐다.

별의 바다라 아름답게 불리는 저 밤하늘의 뜻을 읽고 필요한 답을 찾는 역할은 별의 바다의 점술사가, 밤하늘을 선명히 보이게 하는 역할은 이라가 담당하는 점성술이었다.

점성술이 종료되고 일동은 별의 언덕을 내려왔다. 점성술 다음에는 대신전에서의 긴급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대신전으로 통하는 숲 속 길은 풀벌레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 일행의 발소리만이 자박자박 울렸고,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높이 자란 나무들의 가지가 별의 바다 아래에 그림자를 그렸다.

필란테 시내 곳곳에서 그러듯이 어두운 숲길을 군데군데 하얗게 밝히는 야광나방들의 불빛에 의존해 일행은 대신전을 향하고 있었다.

어느새 사람들은 수풀 사이로 대신전이 저만치에 보이는 숲 속 작은 공터에 이르렀다. 주위에서는 어느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야광나방의 불빛도 흔들림이 없었다.

저 뒤편에서 누군가의 고통스런 비명이 날카롭게 울리기 직전까지도.

“뭐—!?”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들은 전투인원의 비명이 들린 지점을 돌아보고 몸이 굳었다. 단말마로 고통을 호소한 성기사가 마악 모두의 눈앞에서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 하고 시커먼 무언가 앞에서 선혈을 뿜으며 쓰러졌다.

커다랗고, 털의 빛깔은 시커멓고, 두 쌍의 눈은 붉게 빛나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그 끝으로 선혈을 뚝뚝 떨어뜨리며 낮게 으르렁거리는 그것은 낙원 안에는 발도 들일 수 없다던 식인 맹수였다.

위협적인 검은 윤곽은 하나가 아니었다. 적어도 넷은 되었다.

방금 전 사냥에 성공했을 터인 선두의 검은 맹수는 시체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나머지 셋과 함께 곧바로 사람들을 향해 돌진했다.

“모두 각자의 임무를 최우선으로—!!”

호위대장의 다급한 외침이 호위를 맡은 모두에게 호소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크리스타는 아이레부터 감싸고 검을 뽑을 태세를 갖추었다.

성기사도 백은천로의 무사도 어엿한 전투원이라지만, 자신 외의 생명을 무기로 공격해야 할 상황도 예측 불허의 무력 충돌도 좀처럼 없는 낙원에서 이들이 익힌 전투력이나 대응력은 이런 뜻밖의 상황에서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주요 인사 한 명씩을 검은 짐승들의 공격으로부터 막아내려 갈팡질팡 애쓰는 전투원들은 이내 하나씩 부상을 입고 밀리기 시작했다. 맹수 한 마리가 점성술사를 보호하던 성기사를 쓰러뜨리고서 점성술사에게 달려들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어느 사이에 준비했는지, 지금까지 호위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은익이 손을 뻗어 점성술사를 덮치려는 맹수에게 번갯불 같은 빛을 쏘았다. 지직거리는 빛에 묶인 맹수가 몸부림치는 사이에 점성술사는 허겁지겁 은익 쪽으로 몸을 피했다.

“은익! 그걸 이놈들 전부에 쓸 수 있겠소?”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나마도 한 번에 한 마리씩밖에……?!”

대신관의 급한 물음에 은익이 대답하는 사이에 다른 맹수 한 마리가 둘이 선 지점을 향하여 달려왔다. 몸이 굳어 버린 성기사며 무사들과 두 사람을 몇 걸음 앞에 두고 맹수는 멈추어 서서 뚫어지게 노려보다 방향을 틀었다.

맹수가 향하는 곳은 크리스타와 아이레가 호위기사 몇몇을 앞에 두고 서 있는 지점이었다.

은익과 대신관이 외마디 비명을 지른 때 맹수는 이미 목표한 지점을 향하여 도약했다. 크리스타는 아이레를 붙잡고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곧바로 자세를 고쳐 무기를 뽑아 든 크리스타 앞으로 맹수는 이내 천천히 다가왔다.

팽팽한 긴장이 이어지던 중에 맹수가 재차 몸을 날렸다. 크리스타는 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깃털모래의 힘을 상시 머금고 있는 칼끝에 동물의 맨살이 스치는 감각이 전해졌다. 땅바닥에 검은 피 몇 방울이 방어의 흔적을 난폭하게 그렸다. 뒤로 물러나 아슬아슬하게 땅을 딛고 선 맹수는 적의에 차서 이쪽을 향하여 으르렁거렸다. 강건하고 살기등등한 데다 급소도 포착하기 어려운 이 거대한 생물을 혼자서는 처치할 수 없다는 판단이 머릿속에 섰다. 아이레를 곁에 두고 맹수 앞에 대치하고 서서 크리스타는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전투 인원의 절반은 이미 쓰러졌고, 남은 모두가 제각각 자기 자신 혹은 타인의 목숨을 지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포식자란 예전에 대신전에서 배운 대로라면 사냥감 한둘 포획해서 떠날 법한데, 이 검은 짐승들은 사냥이 아니라 살육이 목적인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레 님!”

이쪽의 상황을 목격한 기사 하나가 저편에서 급히 달려오다 거리가 반으로 좁혀지기도 전에 다른 검은 그림자에게 덮쳐졌다. 크리스타는 이를 악물고 눈앞에서 재개되는 맹수의 공격에 반격할 자세를 취했다. 저쪽에서 일행 중 누군가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크리스타!!”

갑자기 아이레가 급박하게 목소리를 냈다. 동시에 지면이 흔들렸다. 아래에서 땅이 묵직하게 우르르 구르는 소리가 나뭇가지의 자잘한 떨림음을 덮도록 커진다 싶더니 몸이 균형을 잃었다. 주변의 비명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섬광이 솟아 사방을 감쌌다. 순식간에 바닥이 발밑에서 사라지고 어디론가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크리스타――!!!」

마음속에 아이레의 절규가 울렸다. 몸이 어딘가에 세게 부딪히는 감각이 일었다. 이어 무언가 돌풍 같은 것이 전신을 휘감았다.

‘!! ……아이레, …….’

 마음속의 절규에 답해 주지도 못한 채 크리스타의 의식은 정처 없이 휩쓸리며 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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