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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사랑의 빛, 검정

사랑은 세상 온 빛깔을 담은 검정이라고 태초에 사랑을 만든 신은 말씀하시고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전해진다

모든 빛깔을 품어 고이 덮은 검정은 세상 어느 색보다도 아름답다고 검정빛 눈을 반짝이던 너는 속삭였다

사랑을 만든 신이 정말로 있다면 너는 그 화신이리라고 나는 온 나를 바쳐 확신했다

사람의 가장 높고 귀한 검정부터 가장 낮고 원시적인 검정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신성할 수 있음을 너와 나의 검정 안에 잠겨 만끽했다

너의 검정빛 두 눈이 담은 무수한 빛깔을 나의 검은 눈은 아마도 빠짐없이 더듬고 안았다

나의 검은 눈 아래 무수한 빛깔도 너의 검정빛 안에 빠짐없이 잠겼으리라

그리 확신함은 검도록 차가웠던 그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풀고 부풀어 오른 검정빛은 어느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깨어진 검정빛이 피처럼 흘린 무수한 빛깔을 나는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했다

흘러넘쳐 산산이 흩어진 빛깔 속에서 너를 잃고 길도 잃고 헤매다 현란한 색의 세상 속 어딘가에 나는 멈추어 섰다

거칠게 혼재한 색의 황량함 안에서 너의 검정빛 두 눈을 떠올리고 만 나는 다시 한 번 두 눈을 감았다

이 세상에 이제 없는 신성은 두 눈을 감아 검정에 잠겨야만 만날 수 있었다
검정 속의 그 검정빛은 끊임없이 흐르는 검은 강물이었다

흐르고 흐르는 강물의 한복판에 검게 빛나는 모래알로 지어진 신전이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반파된 윤곽은 아주 먼 옛날 짓고 허문 어느 다른 신전의 그것을 닮았다

아주 먼 옛날 나는 어느 유일신께 신전을 봉하고 스스로 허물었다
그 신의 이름은 완전무결의 지상낙원이었다

그것이 신의 이름이었는지 신전의 이름이었는지 적어도 두 번은 지어지고 허물어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눈앞의 폐허를 이루었던 모래알이 너와 나의 퇴색한 빛깔임을 나는 계시받듯 깨달았다

깨달음에 검정빛은 찢기고 강물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눈을 뜨고 깨달음을 독백했다

숭배는 신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함은 사람의 일이었다

사랑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토록 바란 것은 사랑이 아니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눈을 감아 검정에 잠기면 검은 강물의 노래는 여전히 귓가를 적셨다

검고 검은 강물은 노래한다
모두 잊은 듯이 앞으로 흘러 나아가라고
그러나 맑은 목소리로 유유히 흐르는 검은 강물아
너의 노래는 이내 오래 전 잃고 허물어진 너의 윤곽을 나의 눈앞에 그려내고 마는구나 나는 너를 사랑했느냐고 나의 색으로 퇴색한 너와 나의 빛깔은 온 빛을 다해 목놓아 물었고 너는 그에 대답하듯 윤곽을 지우고 멀리멀리 흘러가는구나

부풀어 넘치는 검정빛 흐름의 대답을 눌러 담지 못하고 나의 두 눈은 다시 뜨였다

아마도 검은 파편의 빛깔은 눈을 떠도 여전히 귓가에 맴돌며 두 눈가에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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