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검은날개자리의 흰날개성운 4

작은 낙원을 지키던 소년과 소년을 지키던 소녀의 이야기
검은날개자리의 흰날개성운



4. 낙원과 낙원 바깥



“크리스타! 크리스타…….”

갈라져 정체불명의 빛을 뿜은 땅의 틈으로 손을 붙잡을 틈도 없이 떨어진 크리스타의 이름을 아이레는 기사들에게 붙들려 안전한 지점으로 옮겨지면서도 몇 번을 거듭 불렀다.

「크리스타――!!!」

목놓아 불러도 대답이 있을 리 없다. 무질서하게 갈라져 온몸을 흔들며 섬광을 토하던 땅은 틈새를 오므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사실을 끝내 인정할 수 없는 마음은 비명을 지르듯 이름을 외쳤다.

(……아이레)

마음의 음성이 희미하게 전해지다 끊겼다. 백루석을 통하여 간신히 전달된 것이 틀림없는 그 음성이 사라짐과 동시에 빛도 꺼지고, 땅도 뒤죽박죽으로 엉킨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영 운이 없었던 듯한 동료의 시체 하나만 남긴 채 맹수들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살아 있는 인간의 수가 처음의 반 정도로 줄어든 숲속 공터는 다시 잠잠해졌다.

눈부신 빛에 가려졌다 은빛 촘촘한 어둠을 되찾은 별의 바다에서는 미미한 연분홍빛을 띤 달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타라의 실종으로 대신전은 발칵 뒤집어졌다.

대신전의 숲 속 구획 변방 땅밑에 설치되어 잊히고 방치된 지 오래인 방어장치가 검은 맹수들의 살의와 사람들의 두려움에 반응해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고, 하필 그때 방어장치의 영향이 강하게 미치는 지점에 서 있던 크리스타와 아이레 중 크리스타가 장치의 폭주에 휘말려 어디론가 전송되어 버렸다는 것이 그날 밤 일의 대략의 전모였다.

문제의 방어장치는 7백 년 전 새로이 확장되어 아직 불안정하던 낙원의 영역으로 대신전이 터를 옮겨 지금의 자리를 지키기 시작하면서 설치된 함정으로, 낙원 바깥에서 온 침입자를 감지해 낙원 밖 임의의 지점으로 공간이동시켜 신전을 보호했다고 한다.

낙원 바깥은 험악한 자연 환경과 잦은 자연재해, 온갖 위협적인 생명체 등으로 인하여 인간의 생존이 불가능에 가까운 ‘크샨나의 맨얼굴’이었다. 이런 곳의 어디인지도 모를 지점에 사람이 맨몸으로 내던져지는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큰일인데, 오랜 세월 존재조차 잊혔다 느닷없이 폭주한 순간이동장치의 워프 공간에서 인체가 무사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대신전의 누구도 크리스타가 사망했을 가능성은 입에 담지 않았다.

사건이 있고서 바로 다음 날로 대신전과 위원회에 의해 수색대가 비밀리에 조직되어 천문연구소의 기술 지원을 받으며 낙원 밖에서 목숨을 걸고 크리스타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소식은 아이레에게도 전해졌다.

크리스타가 사라지고서 일주일. 하루하루 차츰 진해지던 달의 붉은 기운은 그제부터 급속도로 옅어져 일주일 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달은 빛깔을 되찾아도, 크리스타는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이라의 곁은 이타라 대신 성기사 단원 중 적임자로 뽑힌 이가 지켰다. 아이레와 크리스타보다 두세 살쯤 위인 성기사 니콜은 이타라로서의 능력은 없으나 이타라의 대리라기에 큰 부족함이 없는 실력을 갖추었고 아직 어린 나이에도 인품이 훌륭하다는 평을 듣는 이로, 배려심이 깊어 괴로움에 잠긴 아이레의 심정을 세심히 헤아릴 줄 알았다.

니콜의 세심함도 크리스타의 빈자리를 채워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크리스타에 대한 염려를 잊게 해 줄 수 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저녁이 되어 하루 일과가 끝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아이레는 니콜을 방 밖으로 내보내고 열흘 전 크리스타와 백익루경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창턱에 홀로 웅크리고 앉아 그 악몽 같던 밤의 일을 생각했다.

—그쪽에 있으면 위험해! 이리로 피하세요— —

호위대장이 다급히 외친 순간, 발밑에 땅의 예사롭지 않은 전율이 전해졌다. 맹수와 대치한 크리스타는 이 중 무엇도 듣거나 느끼지 못한 듯했다.

—크리스타!!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자고 재촉하기 위해 크리스타를 불렀지만 때는 늦었다. 지면이 요동하며 바로 발밑까지 갈라진 때 자신은 일행 중 급히 다가온 누군가에게 붙들려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지만 크리스타는 그대로 땅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아이레는 얼굴을 두 팔에 묻었다.

끔찍했다. 살아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그래서 크리스타의 생명을 직접 지킬 수도 크리스타를 스스로 찾아낼 수도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끔찍했다.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자신을 보호하는 자들의 눈을 피해 모은 한 줌의 깃털로 백루석을 만들어 크리스타의 품에 안겨 주는 일뿐이었다. 그마저도 백루석은 그 깃털의 주인인 크샤앤나와 정신이 공유된다는 지식에 무모한 희망을 걸고서 행한 일이었고, 그날 밤 이후로 백루석은 단 한 번도 크리스타의 마음의 목소리를 전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크리스타가 살아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백루석은 아직 단말마를 울리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백루석이, 그 작은 돌이 이 몸을 대신해 크리스타를 죽음에서 지켜 줄 수만 있다면.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익숙한 듯 생소한, 이곳에서는 은익의 목소리보다도 들을 확률이 희박할 것 같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레는 고개를 들고 상대를 확인했다.

“……소장께서, 무슨 일로 이 자리에까지.”

아이레는 방금 전의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 반응을 긍정의 뜻으로 해석한 듯 천문연구소장은 조용히 아이레 앞으로 다가왔다.

“낙원의 마과학기술을 책임지는 일원으로서 사죄의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더니 소장은 한 무릎을 꿇고 아이레 앞에 고개를 숙였다.

“사, 사죄라니 무슨……!?”
“저희 천문연구소는 창설된 이래로 대신전의 보안 설비 설계와 유지에도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주일 전 낙원 밖 생물의 습격도, 방어장치의 폭주도, 저희 천문연구소의 책임입니다. 이라께 생명의 위험과 깊은 심려를 끼친 과실의 무게는 묵과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차갑던 소장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아이레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소장은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낙원 외부에서 이타라를 찾는 일에는 천문연구소도 기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이 발 딛고 설 수 있는 면적만 낙원의 250배에 이르는 위험한 장소에서 인간 한 명을 찾아내는 일이지만, 그 한 사람의 생존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술과 장비를 총동원해 시간과 인적 자원의 소모를 최소화하는 중입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사흘 안에 이타라의 구체적인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저희는 예측하고 있습니다.”

천문연구소장은 차분히 사실을 전하고서 덧붙였다.

“이타라라면 낙원 외부에서도 2주 이상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생환에의 희망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제 보아도 냉정하고 냉혹하기만 하던 이에게서 뜻밖의 말들을 듣고 아이레는 어리둥절해져 있다 겨우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고맙습니다. 이타라의 생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셔서……낙원의 주민들을 낙원 밖에서도 무사하도록 힘써 주셔서.”

의례적인 감사지만 진심이기도 하였다. 그 감사의 말을 받은 천문연구소장은 말없이 아이레를 유심히 주시했다. 그러더니 그 시선을 마주하기가 불편하다고 아이레가 느끼기 시작한 때 슬쩍 표정을 바꾸었다.

“과연. 낙원의 만인을 자신의 생명으로 지키는 분다운 마음가짐이군요.”

그렇게 말하는 천문연구소장의 표정은 마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순간 아이레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의 말들이 자신을 떠보기 위해서였나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 사람이 자신을 떠보려 할 만한 이유가 있는가?

“그래야지요. 당신은 낙원의 생명력으로서, 저는 낙원의 지성을 지탱하는 자로서, 낙원을 위해 각자의 삶을 부여받은 겁니다.”

소장은 덤덤히 덧붙였다. 얼마 전 은익이 했던 말과 비슷한 듯 다르게 들리는 말이 아이레의 불안을 자극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별의 바다의 축복이 충만한 밤을.”

혼란스러움을 내색할 수 없는 아이레에게서 더 이상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천문연구소장은 인사를 건네고 떠나갔다. 홀로 남겨진 아이레는 그대로 서서 출입문 방향만 바라보다 창턱에 주저앉았다.

―과연. 낙원의 만인을 자신의 생명으로 지키는 분다운 마음가짐이군요.

천문연구소장의 말이 뇌리에 되살아난 때, 아이레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그 ‘낙원의 만인을 자신의 생명으로 지키는 자다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돌이켜 보면, 낙원을 지킨다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의심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은 한평생 낙원을 지키기 위하여 탄생했고, 살아 있는 동안 그 목적을 다하며 낙원에 살아 숨쉬는 모두의 행복을 늘 생각하겠다고 다짐을 거듭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이라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 되지 않음에 좌절감을 느끼는 날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곁에는 언제나 크리스타가 있었다. 낙원을 지키는 자신을 온 마음 다해 지탱하며 지켜 주는 크리스타가.

크리스타의 그 마음이 아이레에게는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다.

크리스타가 낙원 밖 어디론가 실종되고서 오늘까지 아이레는 낙원의 만인을 요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와 같은 사명에의 내면적 태만에 자신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죄책감이 없음을 지금 깨달았다.

오직 크리스타가 살아 있기를, 살아서 무사히 낙원에, 이 곁에 돌아와 주기만을 바랄 뿐.

그렇다. 자신에게는 크리스타가 곁에 있고, 크리스타와 서로를 생각하는 순간들만이 낙원이었던 거다.

깜짝 놀라 급히 떠올린 이라로서의 사명 앞에서도 그 사실은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당당했고, 그 당당함에 아이레는 충격을 받았다.

뒤엉켜 몰아치는 감정을 누르듯 아이레는 무릎 위의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사이 태양은 지고, 한 번도 아이레의 눈에 하얀 빛을 비추어 준 적이 없는 달이 창밖에 펼쳐진 별의 바다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낙원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생물이 뾰족한 주둥이에 사냥감을 물고 날개를 펴고서 잔뜩 흐린 하늘을 휙 가로질렀다. 먹잇감을 확보한 포식동물이 다른 먹이를 찾을 리 없겠으나, 바위 틈에 숨어 있던 크리스타는 몸을 움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인지 모를 낭떠러지 밑 작은 강의 기슭에서 한밤중에 깨어난 뒤로 낮과 밤은 일곱 번씩 찾아오고, 이제 여덟 번째 낮이 하늘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검은 짐승과 맞서던 중에 느닷없이 흔들리고 갈라진 땅의 틈으로 삼켜지고서 처음으로 정신이 들었을 때, 몇 군데 찰과상이 나 있고 몸이 뻐근한 것 외에는 별다른 몸의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고 자신이 어째서 이런 곳에 쓰러져 있는지는 아리송하지만, 어쩌면 땅속에서부터 섬광을 뿜은 무언가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멍하던 머릿속이 정리되고서 크리스타는 자신의 가슴 위로 급히 손을 가져다 대어 보고, 목에 걸려 있는 가느다란 끈을 잡아 위로 당겼다. 백루석은 무사히 매인 채 하얀 빛을 희미하게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상황에 큰 부상 없이 목숨을 부지한 것은 몸에 지닌 아이레의 백루석 덕분이리라.

그러나 깨어난 지금, 이곳은 작은 백루석 하나의 힘에만 의지해 계속 머물러 있어도 좋을 만큼 안전한 곳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주위는 온통 돌과 바위투성이로, 공기는 습하고 싸늘하며, 때때로 어디에 몸을 숨겼는지 모를 동물의 음산한 울음소리가 길게 울리며 이 일대에 가득한 불길한 마력의 기운을 흔들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이 낙원이 아님은 명백했다. 낙원으로 돌아갈 방법이 자신에게 없음은 더더욱 부정할 길이 없었다. 향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크리스타는 일어서서 개울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조심조심 이동했다. 지니고 있던 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허리의 단검 한 자루만이 겨우 남았기에 더욱 더 경계심이 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일주일이 지나가는 동안의 하루하루는 낙원에서는 상상도 가지 않았던 위험과 긴장, 공포의 연속이었다. 일년 내내 온화한 낙원과는 달리 이곳은 지금 쌀쌀해 얇은 옷에 방어구만 걸친 몸은 오싹오싹했고, 나뭇가지들은 잎을 거의 떨군 채 가지를 앙상하게 드러냈고, 지형은 험하며 때때로 갈라져 밑이 보이지 않는 저 아래를 시커멓게 드러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황량한 자연에는 대신전의 도감으로만 접한 온갖 동물과 마물이 들끓는 듯했다. 자그마한 것들 몇 종류는 덫을 놓거나 어떻게든 단검을 직접 이용하든가 해서 잡아다 어렵사리 지핀 불에 구워,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날것 상태로 섭취해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에 도움이 되어 주었지만, 그 외의 생물들은 상당수가 사람을 공격해 치명상을 입힐 수 있거나 사람을 먹이로 삼는 것들이었다.

길도 없는 험준한 산의 내리막길이 끝난 엿새째, 눈앞에 펼쳐진 장소는 크고 작은 바위만이 사방을 메워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황무지였다.

평지로 나오면 누군가의 눈에 띄리라는 희망만 믿고 움직인 것은 착오였나? 오늘까지 그런 생각이 몇 번은 고개를 들 만큼 이 일대는 척박했고, 위험한 짐승들은 벌써 몇 마리째 눈에 띄어 긴장을 유발했으며, 심지어 마실 물조차 마땅치 않았다.

낙원 주민들은 직접 보거나 이용할 일이 좀처럼 없지만, 위원회와 대신전, 천문연구소는 연례행사나 낙원 외부의 탐사 등 특수한 상황에만 이용하는 각종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사람들이 자신이 땅밑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단정하지 않고 여기까지 날아와 자신의 행방을 찾는다면? 아니, 하다못해 낙원 외부의 탐사를 위해 여기까지 접근해 오는 인원이 있다면?

그러나 지금은 그처럼 합리적이지도 못한 기대를 떠올리기조차 힘들다. 제대로 먹거나 마시지도 쉬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일주일이 넘도록 곤두세운 신경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날개 달린 포식자가 저 멀리 사라진 뒤 크리스타는 몸을 일으켰다. 바로 앞 가슴 높이의 바위를 가어오르자 팔다리에 더 이상 힘이 실리지 않고 머리가 핑 돌았다. 바위 위에 엎드린 채 크리스타는 오늘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백루석을 꽉 쥐었다.

‘아이레…….’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때, 슬픔 어린 불안이 손바닥에 미약하게 전해짐을 느꼈다. 그것이 아이레의 감정인지 자기 자신의 절망감인지도 크리스타는 알 수 없었다. 한 번 감은 눈꺼풀은 납덩이가 붙은 듯 무거워 열리지 않았다. 몸에 부딪고 지나가는 찬바람도 자장가처럼 아득하다는 생각을 끝으로 크리스타의 의식은 끊겼다.

피오레이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5
검은날개자리의 흰날개성운 3
#17
검은날개자리의 흰날개성운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