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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벚꽃 엔딩

남대생 남친과 벚꽃길을 걷는 낭만을 꿈꿨던 여대생은

“올 봄 서울의 벚꽃은 4월 7일에 개화할 것으로 기상청은 예측하고 있습니다. …….”

아침부터 연중행사처럼 소식을 전하는 앵커의 목소리를 기억에서 흘려보내려 나는 샌드위치를 다 씹지도 않은 입 안에 우유를 흘려넣었다. 시각은 벌써 7시 20분이고, 8시부터 시작되는 1교시 수업을 앞두고서 흐드러진 연분홍 벚꽃 아래를 연인과 둘이서 정겹게 걷는 낭만을 재차 떠올릴 겨를은 없었다. 지난 10월부터 틈만 나면 꿈꾸어 왔던 봄의 낭만이지만, 오늘의 바쁘거나 무거운 일정들을 앞두고서는 그 낭만에 낭만으로서의 권한을 허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이미 낭만으로서의 가능성을 잃었다. 다른 모든 낭만은 현실로 나와서는 하나하나 우습도록 하찮게 부스러졌다. 그리고 아직 실현의 기회가 앖었기에 상상 속에 간신히 살이남아 있었던 바로 그 가능성에게 완전한 결별을 고하기 위하여 오늘 밤의 일정은 예비되었다.





[서울 벚꽃 개화 4월 7일 예상]

그와 자주 오던 카페의 테이블 앞에 아직 홀로 앉아 나는 포털 사이트의 검색 결과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폰을 내려놓았다.

이런 일로 남자친구와 만나면서 아무 사람이나 시선을 향할 법한 장소를 약속 장소로 잡기는 내키지 않으나, 이보다 폐쇄적인 장소는 신변의 위험이 염려되고, 메시지로 이벌 통보를 하자면 결국 번거롭게도 다시 한 번 물리적으로 마주쳐서 마음을 확인해야 할 일이 생기고 말 것 같다.

폰을 다시 들어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7시 59분. 약속 시간으로부터 1분 전이다.

그로부터 4분쯤 더 기다린 뒤에 남자친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4분쯤 뒤임은 재차 시간을 숫자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각을 확인하고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익숙한 노래의 길이는 4분이 조금 넘었고, 그 노래가 페이드 아웃될 즈음에 그가 나타났으니까.

“……지하철이 연착해서 좀 늦었어.”

자리에 앉은 그는 미안하다기보다 미심쩍다는 눈치로 우물거렸다. 그가 자기 몫의 음료를 주문하는 순간까지 나는 그의 모습을 말없이 한 번 훑었다. 나쁘지 않다. 생김새도 행동거지도. 카메라 앞에서 보이는 행실만큼이나 생김새도 흉한 어느 30대 남자가 ‘국민 썸남’ 급의 ‘훈남’이라면 이 친구는 ‘국제 썸남’ 급의 ‘꽃미남’이고도 남겠다(전세계 여성 여러분 죄송합니다). 선량하고 생김새도 나쁘지 않은 남친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그런 요지의 말을 몇 번인가 들었고, 한때는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 몇 달씩 사귀며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남친이면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오늘 왜 만나자고 한 거야?”

태연한 척 하는 그의 물음은 아까보다도 짙어진 미심쩍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기야 그런 일이 있고서 내가 자기를 먼저 불러내리라고는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각자의 3학기 개강을 맞이하기 전, 그는 나를 자기 원룸으로 초대했다. 5개월 가량 이어지는 사이에 미묘하게 막막해져 가던 관계를 나를 어떻게 해 보면 어떻게든 바꿔 볼 수 있다고 믿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날 벌어진 일은 엉뚱하게 불이 붙은 말다툼이 전부였다. 그의 의도가 내키지 않는 내가 끝끝내 노골적으로 눈치 없는 척을 하자 그 얄팍한 인내심이 파삭 깨진 거다. 내가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의 맛에 그가 신경질을 낸 것을 시작으로 둘은 수십 분에 걸쳐 사납게 말다툼을 벌였고, 폭발한 나는 그의 마음에도 없는 거친 사과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 원룸을 나왔으며, 이후로 한 달 가까이 둘은 서로를 보기는커녕 연락 한 번 나누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 T 카페에서 만나]

오늘 만나기 전까지 주고받은 연락은 지난 주에 내가 그렇게 메시지로 적어 보내기 위해 나눈 무미건조한 몇 마디가 다였다.

사실 그 몇 마디 주고받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했다. 그때 이래로 나는 그와의 관계가 안전하기는 어렵겠다고 느꼈다.

“나한테 사과를 다시 받아내야겠다, 뭐 그런 심리야?”
“너한테 사과를 받아낼 생각 없어.”
“그럼 뭐야?”
“뭐라고 생각해?”

무슨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다짜고짜 묻고 드는 그에게 그렇게 답하고 되묻자, 그는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을 지으려다 말았다. 마침 점원이 그의 음료를 가져왔다.

“……황주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서 그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나 진짜, 백날 가도 널 이해 못 하겠다. 나한테 왜 이래?”

반은 불평조로, 반은 애원조로, 그는 다시 한 번 그 말을 나에게 던졌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나와의 사이에 잡음이 생기기만 하면 ‘널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내세웠다. ‘널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이전에도 숱하게 들었었다. 나란 애는 어릴 적부터 일견 얌전하고 무난해 보여도 엉뚱하고 별나기 짝이 없는 애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알았다. 그의 ‘널 이해할 수 없다’, 혹은 ‘너란 여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라는 불만은 ‘여자는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다’와 동의라는 것을.

지금 건너편에 앉은 ‘선량하고 생김새도 나쁘지 않은 남친’은 ‘여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라는 말을 나더러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처럼 종종 입에 담으면서, 나에게는 모든 순간에 편하게 이해받기를 바랐다.

본인이 내가 보내는 메시지의 답장을 미루거나 전화를 받지 않아도,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도, 과제로 바쁘다며 데이트 장소에 아무 복장으로나 머리도 감지 않고 나타나도, 나의 세세한 개성과 그때그때의 감정보다는 그와 내가 얼마나 ‘동등하게’ 데이트에 비용을 치르는가를 따지기에 마음을 써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내가 예민하고 이해심이 부족하고 철이 없다고 그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여중, 여고를 나와 여대에 간 내가 남자의 마음, 남자의 ‘고충’을 잘 모르는 거라고, 나와 똑같이 작년에 대학생이 되어 남녀 공학의 사범대에 다니는 그는 이웃 여대의 사범대에 다니는 동년배의 나를 ‘가르쳤다’.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게. 참 이상한 일이네. 난 너를 너무나 잘 이해하거든. 아주 선명하게.”

그가 무슨 말대꾸를 던지기 전에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너무나 선명하게 이해가 돼서, 구역질이 난다고.”

그렇다. 네 덕분에, 올해가 시작되고서 오늘까지 내 인생은 토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헤어지자.”

이 말을 단호히 전하기 위해 오늘 너를 만나자고 한 거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다 이번에야말로 벌레 씹은 표정이 된 그 앞에서 나는 폰의 액정을 들여다보고, 한 마디 더 못을 박았다.

“일곱 시 반에 여기서 동아리 회장 언니 만나기로 했거든. 벌써 5분 전이니까 이만 가 주는 게 좋을 거야. 저기 계산대에 있는 친구한텐 각자 계산한다고 얘기해 놓았으나까, 계산은 알아서 하고.”

‘계산대에 있는 친구’란 이 근처에 살면서 카페 알바 중인, 말수 적고 웃음도 적고 입 무거운 나의 동갑 사촌이었다. 이제는 얼굴이 벌개져서 나를 노려보다가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계산서를 집어들고는 말없이 홱 돌아서서 테이블에서 멀어져 갔다. 부탁해서 저 옆에 불러낸 내 친구 둘과 ‘쎄고 무섭기로 소문난 우리 동아리 회장 선배’와의 있지도 않은 약속 사이에서 후자를 택함은 의외로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나는 별 근거 없이 생각해 보았다.





그날 떠나간 뒤로 그는 연락도 없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자기를 찬 여친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여친, 혹은 전여친을 스너프 필름의 오브제 삼는 ‘선량한 남친’이 넘쳐나는 가운데, 나는 퍽이나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혹시 몰라서 약간의 친구며 친척이며 한 가닥 인맥을 동원해 본 덕분도 있겠지만 운이 좋아서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운이 좋아서 그런가, 가슴 한구석은 간간이 허전함을 호소하다 막연한 후회 비슷한 감정을 울먹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연인 한 쌍의 머리 위에 가지를 드리우는 벚나무에게도 사계절이 있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지우고 한철의 연분홍빛 개화만을 관람하는, 그 개화의 끝에 떨어지는 자그마한 꽃잎 한 장의 의미는 고사하고 벚꽃의 개화 시기도 예보를 벗어날 수 있음조차 이해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랑을 나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건 사랑도 아니야.

만방에 그리 외치듯, 서울의 벚꽃은 보도된 예측보다 일주일 빨리 피었다.





“나, 서울 와서 벚꽃 구경은 처음 해 봐.”

한강변의 흐드러진 벚꽃을 올려다보며 경아가 한 마디 꺼냈다. 미세먼지 농도가 ‘좋음’이라는 오늘도 서울의 하늘은 탁하기만 하지만, 이 길을 가득 메운 벚꽃은 아름답고 고왔다.

“작년엔 입학하고서 한동안 말도 아니었잖아. 혼자 우울하다고 세상 잃은 듯이 방구석에 처박혀서.”
“요즘은 좀 어때? 괜찮은 거지?”

소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난번에 그와 이별하기에 앞서 그 장소에 있어 달라고 내가 이 둘에게 어렵게 부탁한 때에 아무도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응. 너희들 덕분에 살았어. 살아서 오늘 이렇게 데이트도 하고 그런다.”

경아는 활짝 웃어 보였다. 작년 이 무렵에 경아더러 병원에 가 보라고 설득한 것은 소미와 나였다.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간신히 근처 정신과 의원에 발을 들인 지 반년이 지나자 경아는 차츰 차도를 보였고, 해가 바뀌어서는 예전의 자신을 제법 되찾았다.

의사도 뭣도 아닌 내가 회상해 보아도, 경아는 고교 무렵부터 마음이 건강치 못했던 것 같다. 밝고 씩씩하지만 때때로 ‘기분이 가라앉아 있다’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불안정하게 침체되어 있었다. 경아가 보다 건강했다면, 경아의 가정이 경아의 마음을 그렇게나 힘들게 하지 않았다면, 경아는 나와 경아가 지금 다니는 대학보다도 더 간절히 원했던 대학의 원하는 과에 진학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경아는 고비를 넘기고서 이만큼 건강해졌고, 그날 나의 고민에도 앞장서서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병원은 계속 다녀?”

말이 나온 김에 나는 슬쩍 물어보았다.

“어. 저번엔 원장님이 나처럼 복용 지도에 맞춰서 약 꼬박꼬박 잘 먹는 환자도 드물다고 좋아하더라.”

반 농담처럼 내놓은 말에 나도 소미도 웃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진짜 내가 한 턱 쏠게. 저번에 시간 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야, 주연아, 뭘 그 정도 가지고. 근데 카페에 앉아 주고 저녁 한 끼라니, 꿀이다 꿀.”
“하여간 솔직한 거 봐.”

경아의 반응을 소미는 한 마디로 평하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뒤로 걔랑은 완전히 끝난 거야?”
“그렇게 봐도 될 것 같아.”

이별 선언은 2주 가량 깨지지 않고 있으며, 그와의 접촉도 일절 없으니까.

“걘 기껏해야 너네 학교 대숲에 숨어서 음험하게 뒷담화나 까고 있겠지. 과연 ○대 여자는 어쩌고 하면서. 복수에 써먹을 동영상 하나 없잖아.”
“난 대숲엔 잘 안 들어가는데, 그런 글이 눈에 띄면 적당히 쓴맛 좀 보여 줄게. 걔가 썼든, 누가 썼든, 누가 까이든.”
“오, 과연. 우리 중에 키배 하면 손소미잖아. 난 키배 뜨고 싶어도 화력이 딸려서…….”
“인터넷 악플 열어보는 거 자제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짆아. 아마 그 원장님도 그런 말씀은 하셨을 것 같은데.”
“우와, 귀신이네 귀신.”

소미의 딴지에 경아는 짐짓 멋적은 모션을 취했다.

“암만 봐도 S대 의전원은 소미가 가야 된다니까. 가서 아예 정신과 의사까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 갖고 무슨 정신과 의사야. 난 내 학교랑 전공이 좋아.”

경아는 이번에는 뜨끔한 표정이 되었다. 소미는 내신도 모의고사 점수도 수능 성적도 우리 셋 중에 제일 뛰어났고 S대 웬만한 과쯤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런 소미가 서울 소재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S대 의전원 진학 준비 중인 오빠의 뒷바라지를 학부 생활과 병행하는 조건으로 부모님에게 서울 유학을 허락받았기 때문이었다.

“의전원에 안 가도 국제기구엔 갈 수 있잖아.”

소미는 단지 그렇게 덧붙였다. 잠시 말이 끊기고 셋 다 계속 앞으로 걷기만 하던 중에 내 마음에 무언가가 불쑥 떠올라 걸리적거렸다.

“근데 참 희한해.”
“뭐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을 삼킬 수 없어서 혼잣말하듯 입을 열자 둘이 일제히 물었다.

“그딴 놈 차 버리면 속시원할 줄만 알았는데, 자꾸 과거를 보게 되더라고. 내가 그때 이랬으면, 걔 마음을 조금만 더 헤아려 줬으면 이 연애도 더 잘 풀렸지 않았을까 하고…….”
“……야, 그날 너한테 부탁을 들었을 때를 생각하면 안전이별 성취해서 천만다행이다, 난 이렇게밖에 생각 안 돼.”

경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은 다양하지만.”

소미가 조용히 말했다.

“가망 없던 연애에 연연하며 자책하는 것보다, 세상엔 재미난 일이 많으니까.”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이 났다. 내가 오늘 친구들을 흐드러진 연분홍 벚꽃 아래로 불러낸 이유가.

“그리고 나도 경아 말에 동감이야.”

소미가 동감을 표하자 경아가 씩 웃었다. 내 가슴속에도 따라 웃음이 번졌다.

“너희 말이 맞아. 그래서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거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셋의 얼굴은 만개한 벚꽃보다 환해졌다.

흐드러진 연분홍 벚꽃 아래를 연인과 둘이서 정겹게 걷는 낭만은 벚꽃이 서둘러 피기도 전에 시들었고, 내 손에 한 번 뿌리뽑혀 사라졌다. 하지만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지는 이 거리를 친구들과 걷는 기분은 서울 하늘의 미세먼지도 전부 걷어낼 듯이 맑고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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