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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러와 인류애

2018.06.05. 네이버 블로그씨 질문. 환경 보호를 위하면서 남의 인류애를 해치는 흔한 K-매직

한 번 쓰고 버려져 자원의 낭비로 이어지는 일회용 컵은 자연분해도 더뎌 자연 환경에 막대한 피해를 준다고 하니, 나도 이제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텀블러에 담는 환경사랑 카페족 대열에 끼어 보자! 학기 초에 그렇게 다짐한 뒤로 새내기 때 학부학생회로부터 받고서 입대하기도 전에 존재조차 까먹고 올해까지 n년 동안 원룸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텀블러를 캠퍼스 근처 단골 카페에 들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내게는 전에 없던 즐거움이 생겼다. 환경보호에 동참한 대가로 100원을 덜 지불해도 되는 즐거움 따위가 아니다. 매주 화요일 오전, 수요일 점심이면, 얼마 전 카페에 새로 들어온 긴 흑발 생머리 포니테일에 하얀 얼굴의 여알바에게 매번 같은 텀블러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한가득 받고 하늘로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캠퍼스 정문을 밟는 거다. 아마 우리 학교 후배인 듯한 여알바는 내가 미처 세척하지 않은 텀블러를 멋적게 내밀면 조신한 생김새만큼이나 얌전하게 텀블러를 씻어 정성스럽게 아메리카노를 채워 내게 돌려 주었다. 대학에 입학해 n년 동안 잠깐 사귀었다 헤어진 몇 명인가의 여친들한테도 받아 본 적 없는 호사를 일주일에 두 번씩 누리며 학교를 다니던 나날은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갑작스럽게 끝나 버렸다. 과제다 팀플이다 해서 폐인처럼 꾀죄죄한 몰골이 된 채, 마찬가지로 씻지 않아 꾀죄죄한 텀블러를 어느 때보다도 멋적게 그 여알바한테 내민 때, 여알바는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번 주부터는 세척하지 않은 텀블러엔 음료를 담아 드리지 않아요.”

밤샘의 여파로 나를 짓누르고 있던 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눈을 크게 뜨고 여알바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여알바는 카운터 앞에 놓인 푯말을 가리키며 방금 전의 말을 다시 간략히 전했다. 정색을 하고 있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법한 그 면상에 뭐라 더 대꾸할 수는 없었다. 아침의 카페는 줄이 제법 길었으니까. 나는 텀블러를 거두고 순순히 종이컵에 아메리카노를 받아서 카페를 나섰다. 캠퍼스로 향하는 내 마음속은 에스프레소 머신 안에서 데워지는 물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그 희멀건 낯짝의 시건방진 표정과 눈빛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른다. 시발년이. 네가 뭔데 그 따위로 눈을 부라려? 다음에 가거든 면상에 커피를 확 부어 버릴까 보다. 아니지.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으로 판단해야지. 카페가 아니라 캠퍼스 안으로 수정하는 편이 나을까……아니다, 아니야. 이런 일에 머리를 쓰느니 근처의 다른 카페로 가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씨발. 오늘의 피폐한 몰골이 새삼 쪽팔린다. 이보다 더 멀쩡한 컨디션에 멀쩡한 차림새로 나왔었다면 이렇게 찍소리 않고 종이컵 받아들고 나오는 걸로 안 끝났었어. 재수 좋은 줄 알아, 썅년아.





“뭐? 그래서, 그 새끼 그 뒤로 안 와?”
“그런 것 같아.”

볶음밥을 뜬 숟가락을 든 채로 눈을 크게 뜨고서 묻는 단발머리 친구에게 긴 생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은 여학생은 덤덤히 답했다.

“솔직히 그날 좀 무서웠어. 텀블러 안 씻어 주기로 규정을 바꿨다, 그 말 한 마디 했다고 카운터 앞에서 도끼눈을 할 게 뭐야.”
“네가 무서운 게 다 있……아니지, 남자들이 좀 흉악하고 찌질하냐? 완전 걸어다니는 지뢰지, 참. 글구 걔 우리 학교 ○○학부 같다며. 텀블러를 보아하니.”
“○○학부랑 우리 학부 건물이랑 캠퍼스 양쪽 끝에 떨어져 있잖아. 그건 다행인 것 같아. 마주칠 확률도 낮고.”

여학생은 소면을 젓가락에 돌돌 말아 입 속에 쏙 넣고 우물거렸다.

“암튼 사장님이 우리 건의를 들어 준 덕에 이젠 주마다 두 번씩 지저분한 변태놈도 안 보게 된 것 같아. 100원 할인받겠다고 안 씻은 텀블러 가져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잖아. 알바 입장에서 텀블러는 세척해서 가져오라고 먼저 속 시원히 지적도 못 하는 것만 해도 답답한데, 악취나는 텀블러 박박 씻어서 커피 담아 줄 때마다 지가 내 남친이나 남편이라도 된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 토 나와, 진짜. 혼자 드라마를 찍는 거야, 뭐야.”
“그러네……그동안 욕 봤다. 진상 하나 줄었네.”

두 학생은 맛있지도, 그렇다고 맛없지도 않은 각자의 점심 메뉴를 몇 입 더 씹어 삼켰다. 잠시 후 새로 말문을 튼 것은 머리 긴 학생이었다.

“사람은 참 신기해.”
“뭐가?”
“환경을 위한다며 일회용 컵 대신에 텀블러를 쓰면서도 남의 인류애는 사뿐히 즈려밟아 주시니 말이야.”

단발머리 학생이 풋 하고 웃었다.

“환경을 위하는 게 아니라 일회용 컵 값을 아끼기 위한 거 아니야?”
“결과적으로 환경을 위하는 건 같잖아……누구나 이런 식이면 지구 환경이 먼저 망할까, 인류애가 먼저 망할까, 궁금해.”
“이미 둘 다 망한 것 같은데. 미세먼지도 쩔고.”
“우리가 죽기 전엔 완전히 망하진 않겠지.”

두 학생은 실없는 대화를 가볍게 주고받으며 점심 식사를 계속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면 둘은 여느 때처럼 다음 강의가 있는 강의실과 제일 가까운 교내 카페에서 한 잔에 1천원인 커피를 주문해 가벼운 일회용 컵에 받아 들고 강의실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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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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