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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람회

미술의 나라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던 여성 미술가들이 '미술의 힘'을 손에 넣고, 그들의 전람회가 나라를 휩쓴다. 2018년 8월 브릿G 혁명소일장 참가글.

‘고학력 신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영리한 화풍’

‘스물넷 꽃다운 나이의 백작 부인의 시선으로 재구성해 화폭에 풀어 놓은 번영의 시대. 숨막히게 미려하지만 피상적인 공상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점은 아쉽다.’

‘색채의 미와 경이를 한계까지 추구하는 콤벨력 19세기에 선과 명암, 형태만으로 미술계에 도전장을 내민다는 당돌한 배짱은 여성이 결혼을 통하여 얻는 신분과 재산, 남편의 이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단한 권력이라는 반증일 것.’

‘아렐 리에타 디 로잔드 백작 부인이 색깔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소문의 진위는?’

‘자신의 미모와 젊음, 남편의 이름과 재력의 후광으로도 모자라 신체 장애를 내세워 자신의 전시회에 동정 어린 관심을 모으려는 전략인가. 그러하다면 로잔드 백작 부인의 첫 전시회는 ‘여자의 눈물’이라는 베네체의 오랜 관용구가 적확히 들어맞는……’




마지막으로 펼친 평론을 읽다 말고 리즈는 잡지를 사무용 책상 위에 내팽개쳤다.


빌어먹을. 이것도 평론이라고 잘도 잡지에 기고해서 돈까지 받아먹나?


곧잘 찾는 단골 식당에의 권유도 물리치고 홀로 서의 사무실에서 잡지 몇 권을 뒤적인 뒤 리즈에게 남은 것은 부글부글 끓는 울분이었다.


예술 작품을 분석하고 평하는 일, 또는 그 글을 평론이라 정의한다면, 리즈가 방금 전까지 읽은 것들은 평론이 아니다.


이 잘난 평론들을 쓴 자들 중 누구 하나 로나한 부인의 작품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들이 본 것은 오로지, 이 소묘 전시회를 연 화가가 ‘세상 물정도 모르고 남편 덕에 팔자까지 늘어져 낙서나 끄적이며 제 장애까지 전시하는 어린 계집’이라는 그 한 가지.


아니, 그조차도 과대평가다.


‘어린 계집 주제에’. 그들의 ‘평론’이 떠드는 말은 단지 그것뿐이다.


리즈는 책상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잡지를 노려보았다.


이것은 평론도 아니다. 평론을 가장한 저열한 인신공격일 뿐. 세상 어느 누구의 예술 작품도 이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더구나 아렐은, 장담컨대 리즈가 보아 온 동시대의 어느 그림보다도 놀라운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다.


7년지기 친구로서 갖는 호감으로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다. 아렐의 채색화는 미술 교육을 받은 이의 것이라기에는 어딘가가 너무도 어색하며, 어색하다 못해 거북하기까지 했다. 널리 이름을 알리고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하는 화가들 중 색을 쓰지 않는 화가란 좀처럼 없으며, 특히 베네체와 그 주변 국가 미술계에서 색채의 기교와 힘이 창작의 핵심으로서 주목받는 오늘날, 색을 제대로 다루지 못함은 화가로서 가망이 없음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렐은 선과 명암만으로 고금의 어느 색채의 거장도 능가할 듯이 독창적이고 압도적인 그림을 여럿 그려냈다.


때로는 다정하고 때로는 단호한 그 신선한 박력은 익명의 여성 화가 모임 ‘트레디포’(주 : 트로 에디나오포, 즉 ‘미술의 신을 섬기는 유랑자들’이라는 뜻의 베네체 어를 줄인 명칭)의 합작 전시에서도 이름 없이 위력을 발했고, 아렐이 남편의 유래 없는 적극적인 격려와 지원이 계기가 되어 자신의 이름으로 연 첫 개인전이야말로 그 힘이 세상을 뒤흔들 최초의 무대가 되리라고 리즈는 기대를 걸었고, 개인전을 직접 관람하며 기대를 재차 확신했다.


그러나 예술의 파격성을 과감히 내보이고도 최소한의 존중은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여성 화가에게는 여전히 요원했다.


대륙에서 제일가는 미술의 왕국 베네체란 미술 아카데미조차도 여학생을 정원의 10퍼센트까지만 수용하는 동네, 적정 신분을 갖춘 남성에게만 ‘진정한 미술’의 달인, ‘국가 공인 미술가’의 자격을 부여하는 나라 아닌가.


책상 위에 어질러진 이 모욕들 앞에서도 24세의 아렐은 침착성을 지킬지 몰라도, 아렐보다 6년을 더 오래 세상을 겪은 리즈의 마음속은 좀체 침착해지지 못하고 부글부글 끓었다.


친구의 인격이 받은 부당한 폄하로 끓어오른 분을 불씨로 삼듯이, 리즈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란 남자들이 거의 독점해 온 경찰의 세계에서 동료 남자 경찰들과 조금이라도 더 밀접히 어울리기 위한 도구이자, 잠깐의 멍한 해방감을 머릿속에 꽉 채웠다 사라지는 합법적인 흑마술이다. 빨아들인 연기가 분노한 의식에 금세 스며 몽롱한 무력감으로 변했다.






미술인협동조합 틸로 지점의 금융 창구 대기실 한 벽면에는 색상의 조화가 역동적인 그림 하나가 걸려 있었다. 4년 전 왕립 아카데미 미술과를 졸업하자마자 국가 공인 미술가 자격을 따고 온 왕국의 이목을 끈 젊은 남성 화가의 작품으로, 신화 속 거대한 꽃의 만개 혹은 전설 속의 새를 연상케도 하였다.


<도약>.


남자 동창의 작품에 붙여진 제목과 그림을 대기실에서 무심히 대조해 보던 젊은 귀부인은 재차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눈에 비치는 저 그림은 도약이라기보다 어딘가가 애매한 탁류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처럼 극심한 괴리는 이 그림만의 일이 아니다. 자신이 보는 색이 남들과 다름을 귀부인은 간과할 수 없다.


“예금하실 ‘물품’은 이……콩테가 전부인가요?”


금융 창구의 직원은 아주 새것 같은 콩테 하나를 앞에 두고 귀부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네.”


일견 평범한 녹색 콩테에 불과해 보여도 시간을 들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색이 마치 살아 숨쉬듯 끊임없이 갖가지 녹색으로 오묘히 변화함을 눈치챌 수 있는 미술 도구. 그 변화의 어느 순간과 꼭 닮은 색깔을 띤 두 눈으로 아렐은 직원을 똑바로 보며 답했다.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대기석에서 기다리십시오.”


아렐을 잠시 마주 보던 직원은 그렇게 말하고서 보통의 금융 시설보다는 고대 마법 연구소에 놓여 있을 법한 모양새의 장치에 녹색의 도구를 안에 넣고 살피기 시작했다. 대기석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꿋꿋이 자신을 지탱해도, 마음은 금방이라도 전방위에서 짓눌려 우그러들 것만 같다.


혹평이라는 이름의 인신공격에 얼룩진 채로 전시회가 끝나고서 근 반년, 남편인 로잔드 백작은 전에 없이 아렐을 냉소적으로 대해 왔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라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아니, 미협(미술인협동조합)을 같은 이유로 몇 번이나 드나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넉넉지도 않은 형편에 빚까지 진 관료 집안의 빚을 대신 갚아 주는 조건으로, 이제 마악 졸업한 아카데미에서도 인형처럼 예쁘기로 소문난 스물한 살 딸을 제 신부로 데려온 당시 35세의 백작은 결혼식 후 1년도 지나지 않고서부터 줄곧 일에만 매달리며 자주 오래 집을 비웠다.


그리 많지도 않은 나이에 벌써 왕실 문화예술청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남편은 예술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아도 ‘여자들의 예술가 놀이’에는 코웃음도 치지 않는 고상한 귀족으로, 아렐의 미술 취미를 알면서도 관심 범위 밖에 두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느닷없이 아렐에게 그간의 무심함을 사과하더니 ‘개인전을 연다면 아낌없이 지원해 주겠다’며 미술 전시회를 열어 볼 것을 제안했다. 남편에게는 비밀로 부친 트레디포에서의 이름 없는 합작 활동으로 만족하고 있던 데다 남편의 변덕이 의아하기만 했던 아렐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거절했으나, 끈질기게 반복되는 남편의 제안은 제안이라기보다 필사적인 애원이었다.


애원이 어찌나 절박한지, 종국에는 아내로서 죄책감까지 들었다. 더구나 이런 기회를 흘려보내기도 아깝다는 마음도 강해져, 마침내 아렐은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 남편의 후원을 받아 자신의 이름으로 개인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아카데미 시절에 틈만 나면 자유로이 그려 모은 그림들. 가족을 위해 감내한 결혼 후의 소외감과 고립감을 다채롭게 풀어 놓은 그림들. 그것들 중 일부를 아렐은 특정의 주제를 기준으로 선별해 전시를 구상했다. 남편의 주장으로 시작된 기획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나름대로 열성을 다했다.


바로 그 전시회의 제안을 처음 들은 때로부터 수 개월 전부터 남편이 인근 소도시를 드나들며 자기보다 스무 살쯤은 어린 어느 중산층 가정 소녀를 집요하게 쫓아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렐은 전시회가 끝날 무렵에야 알았다.


백작의 불륜을 안 리즈는 백작을 당장 잡아 죽일 기세로 길길이 뛰었다. 그러나 개인이 개인에게 행하는 살인은 명백한 범죄여도, 귀족 남자가 열여덟 번째 생일을 앞둔 17세 청소년을 상대로 행하는 불륜은 처벌할 길이 사실상 전무했다.


베네체에서 귀족 남성의 불륜은 아내의 의무 태만 탓, 아내의 하자 탓으로 돌려지기가 다반사로, 남자는 아내에게 관용을 베풀거나 아내를 버리고 불륜 상대인 여성을 취하면 그만이다(어떤 경우에도, 본래의 처에게 떠넘겨지지 않은 남편의 잘못은 자연히 불륜 상대인 여자의 몫이 되곤 한다).


그리고 ‘눈의 장애’가 하자라 하면, 상황은 아렐에게 매우 난처하다. 가족 외의 누구에게도 시원히 털어놓은 적이 없으나, ‘색깔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라는 소문은 사실이니까.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 색채의 종류도 가짓수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아렐은 10대 적에 알았고, 그럼에도 어떻게든 미술을 놓지 않으려 고군분투한 끝에 왕립 아카데미 미술과에 입학해 ‘색상에는 극도로 서툴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뛰어난 학생’으로서 졸업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렐의 눈 상태에 관한 소소한 의혹도 함께 생겨나 소문이 되어 돌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첫 개인전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전시회가 끝이 나고, 불륜남은 ‘네가 내 재산을 노리고 눈의 장애를 속이지나 않았느냐고 묻지 않는 걸 감사히 알아라’라며 적반하장이었다.


그리하여 지난 반년 사이, 로잔드 백작이 그 소녀를 본인의 첩 아니면 새 부인으로 들일 것은 베네체의 수도 틸로에서 기정사실처럼 굳어졌고, 그 개인전에서 아렐을 공격한 것과 똑같은 여론의 화살이 이 스캔들을 전부 아렐의 탓으로 돌렸다.


부부 사이에 여태 자식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아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자잘한 화살들이 끈질기게 날아드는 동안, 아렐은 가급적 타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미협을 드나들었다.


남편이 수년 전의 자신보다도 어린 소녀 하나를 새로운 소유물로 취할 작정이라면, 그 전에 자신은 새 기반을 마련할 자원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작품, 심지어 귀중한 그림 도구도 이 ‘미술인협동조합’에 ‘예금’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다.


이 왕국의 주류 미술인들, 그 외 국민들 대부분은 모르겠지만, 미술인협동조합에서 미술품과 그림 도구는 세상의 자본과는 전혀 다른 기준에 따라 특수한 값이 매겨져 왔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아렐은 이 특별한 그림 도구만은 끝까지 지니고 싶었다.


좌절과 굴욕감으로 끝난 그 전시회의 핵심은 지금 저만치에서 값어치를 평가받고 있는 ‘녹색의 콩테’로 그려낸, 한 폭의 커다란 신작이었다.


‘너의 눈 색깔을 닮았다’며, 미술에 문외한인 자신은 다룰 방도가 없는 콩테가 아렐의 손끝에서 빛을 발하기를 바란다며 이 콩테가 담긴 스케치용 콩테 세트를 선물한 이는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리즈다.


아렐은 물론, 아렐처럼 운 좋게 아카데미 미술과 여학생 할당제라는 바늘 구멍 만한 기회를 손에 넣지 못한 여성들, 그리고 다양한 이유로 미술계 주류에서 배제된 이들의 미술에 리즈는 깊고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아렐에 대해서는 미술 활동에 관해서뿐 아니라 다방면으로 마음을 쏟았다.


그러니 이 도구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음은 이것의 경이로운 초자연적 표현력, 아렐의 눈에 보인 적 없는 어느 색의 다채로운 이세계, 몇 번을 써도 닳지 않는다는 위안 어린 불가사의를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달리 어쩔 방도가 없다. 자신을 백작가에 팔다시피해 집안의 위기를 겨우 넘긴 부모님조차도 겨우 1년 후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자신의 평판과 입지는 엉망이 된 이상.


그리고 이 와중에도 외면할 수 없는, 비밀리의 동료 미술가들, 그리고 미술계와 관련한 중대한 사안.


“실례합니다, 조합원님.”


스스로의 처지를 곱씹다 물품 감정이 평소보다 길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저 앞의 창구 직원이 아닌 보다 익숙한 이의 목소리가 아렐을 상념에서 끌어냈다. 고개를 들자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키는 리즈보다도 크고 머리도 짧고 복장도 남성 정장 양식으로 간혹 조심성 없는 이들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도 하는 또래 여성이었다.


“회장님께서 잠시 뵙자고 하십니다.”

“지금 은행 업무 중입니다만.”

“그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으십니다.”


미협 틸로 지점은 미협 중앙회와 인접해 있으며, 중앙회에 자주 드나드는 현 회장은 미협의 일에 열성적인 여인인 동시에, 간혹 미협 틸로 지점을 찾는 여성 미술가를 먼저 불러다 붙들어 놓고 예술에 관하여 길게 수다를 떠는 것으로도 좋게든 나쁘게든 퍽이나 유명했다. 아렐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회장님께 조합원의 사적인 정보를 감시할 권리라도 있는지요?”


조합 직원은 공손히 아렐에게만 들리도록 답했다.


“‘혁명’을 위해서라 전해 드리면 양해하실 거라 들었습니다.”






“……변화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희생이 발생할 가능성은 간과할 수 없습니다.”


틸로 동쪽 외곽에 위치한, 최다 수용 인원 128인의 소규모 지하 폐극장. 베네체 여성 미술인 익명 공동체들의 구성원이 객석을 메우고, 그들 각각의 대표가 무대 위에 임시로 마련된 자리에 앉은 가운데, 전쟁 포로로서 수십 년을 겪은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지 8년인 검은 피부의 중년 여성은 객석을 향한 설파를 엄숙하게 끝맺고 자리에 앉았다.


“납득하기 어렵네. 미술은 무기라는 말이 이런 뜻은 아니잖아요?”


뺨에 가느다란 흉터가 나 있고 팔에는 깁스를 한 화가가 머뜩찮다는 듯 이의를 제기했다. 그 몸의 부상은 아내인 자신에게서 이상의 뮤즈를 찾는 일에 집착하던 미술가 남편이 낸 것으로, 결국 화가는 집과 자녀들을 뒤로 하고 피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합법적으로 요구해서 이루어진 게 있던가요? 민원으로도 시위로도 이룰 수 없고, 되려 신변의 위협만이 돌아온다면,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단으로도, 우리를 지킬 수단으로도 이보다 더 효과적인 게 뭐가 있지요?”


안경을 쓰고 여자친구와 나란히 붙어 토의를 듣던 조각가가 무대 중앙의 긴 테이블을 가리키며 의견을 냈다. 그 테이블 위에는 도화지 몇 장과 붓, 물감, 팔레트, 목조 공구, 석조 공구, 흙 한 줌 등 다양한 미술 도구 및 재료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평범한 미술용품 같기만 한 이들의 틈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이 선명한 녹색 ‘콩테’도 자신의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


“법을 바꿔 달라고 얌전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 끝나진 않겠죠. 우리는……사회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작정으로 이번 일에 임하려는 겁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남성 정장을 갖추어 입은 여성이 저편에서 거들었다.


“흠……미협의 봉급으로 먹고 사는 분이 대담하기도 하지. ‘혁명’도 벌써 반쯤 이루어진 것 같네.”

“전 조합장님을 거들어 가능한 한 혁명의 전력을 강화해 왔을 뿐입니다.”


능청스레 한 마디 보태는 여성은 왕립아카데미 미술과에 여학생이 처음으로 입학한지 3년째인 18년 전, 미술계 풍자화 하나 발표했다가 2년 간 다니던 왕립아카데미에서 즉각 학적이 말소된 후로 뒷골목 주민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며 생계를 이어 가는 이였다. 그 농담에 미협 본부 비서는 담담히 답하며 아렐에게로 눈길을 향했다.


“‘9개월 전 우리 일원 최초의 본인 명의 개인전도, 그 과정에 크게 기여한 셈이지요.”


버려진 극장에 모인 여성 전원은 아렐과 그 전시회의 언급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9개월 전 아렐이 자신의 본명을 내걸고 연 개인전. 당시 트레디포는 물론 온갖 비공인 미술인 모임 내에서도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으나,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여성들의 생각은 일치했다.


오늘 토의의 참가자들을 가만히 둘러본 아렐은 마음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버려진 소극장에서 벌써 몇 사람이 객석에서 일어나, 혹은 저 무대에 올라 자신의 뜻을 적극 피력했다. 이제는 자신이 목소리를 낼 때다.


“수 세기 전부터, 이 나라는 국가 공인 미술가의 자격을 정해 일부의 국민에게만 부여해 왔습니다.”


아렐은 말을 이으며 무대로 향했다.


“먼 옛날부터 이 대륙에서 미술은 인간의 예술인 동시에,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은 이세계의 힘을 예술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해 인간의 승화를 돕는 매개체였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게시겠지요. 국가는 그 점을 두려워해, 직업 미술가로서 안정적으로 생활할 권리를 보수적인 기득권자들에게만 보장했어요. 그 자격을 인정받기 위한 교육의 기회도요. 전부, 성별과 신분, 인종, 성향, 사상을 기준으로요……그렇게 하면 국민들이 나라와 사회가 인정한 미술을 ‘진정한 미술’이라 알고, 초월적인 이세계의 힘은 잊은 채로 국가에 쉽게 통제될 거라 믿고요.”


잠시 말을 끊고, 아렐은 무대에 올랐다.


“특히, 성차별은 어느 통제보다도 견고하지요. 이 나라는 ‘예술과 교양을 사랑하는 아버지들이 세운 나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여성들은 미술 교육의 기회도 철저히 차단당한 채, 재능, 기술, 안목, 어느 면에서도 미술에 있어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오랫동안 취급되었습니다. 미술을 독점한 기득권은 물론이고, 미술에서 소외된 약자들도, 여성은 미술을 논할 자격을 타고나지 못했다고 단정했지요. 이 모든 어려움을 딛고 미술가의 꿈을 이루어도 여성은, 여성의 작품은, 지워지고 잊혔습니다.”


무대에 오른 아렐은 테이블에서 자신의 콩테를 집어올렸다. 그러고는 무대 위와 객석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미술이 담을 수 있는 이세계의 초인적인 힘을 우리가 이번 기회에 직접 응용해 보인다면, 국가가 변하기도 전에 국민들이 먼저 깨닫는 바가 있을 겁니다.”


비장하도록 조용한 폐극장 내에 아렐의 목소리가 또렷이 울렸다.


“우리 국민 모두가 잊어야 했던 힘을 기억해내면, 다 함께 그 힘을 발휘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만 한다고요.”






친구의 첫 개인전이 끝난 지 한 해. 최근 틸로 경찰청의 수사며 업무는 미술계의 어느 격동을 중심으로 타 지방 경찰청과의 연계하에 진행되고 있었다.


‘국가 공인 미술인 제도를 전면 개편하라’든가, ‘고등 미술교육기관의 여성 입학 제한을 철폐하라’ 등, 요 몇 달 사이에 빈번했던 민원이나 복면 시위의 배후를 밝혀내라는 정부의 명령에 따라서였다.


“아렐—”


전날 수사 도중에 목격한 친구를 다음 날 미술인협동조합 앞에서 발견하고 리즈는 이름을 외치려다 황급히 목소리를 삼키고는 헐레벌떡 달려갔다.


“……오랜만이네.”


연락도 접촉도 뜸하다 석 달 만에 만난 아렐은 수척하고, 이쪽이 무안해질 정도로 무덤덤했다. 안부를 물을 주지 않고 아렐은 말을 이었다.


“휴일이지? 우리 집에 잠시 들렀다 갈래?”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묻고 싶은 것도 전하고 싶은 말도 산더미니까. 그러나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쑤신다.


아렐을 따라 당도한 작고 초라한 두 칸 방은 친구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소리도 없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듯하다. 그 인간 말종에게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억울하고 고단한 현재의 상태를.


“예나 자금이나, 이 차는 포기 못 하겠더라.”


그렇게 말하며 아렐은 쟁반을 리즈 앞에 내려놓고 유리 티포트에 끓은 물을 천천히 부었다. 건조된 꽃의 파란 꽃잎 빛깔이 찻물에 퍼졌다. 연기 같기도 한 파란 물의 가장자리는 보랏빛을 띠었다가 금세 짙어진 파란빛에 녹아들었다.


아렐의 눈에 이 빛깔은, 빛깔의 변화는 어떻게 보이는 거지?


파란 찻물의 향을 음미하며 리즈가 떠올린 그런 쓰라린 의문은 아렐의 그 다음 말에 묻혔다.


“이것저것 처분해 둔 덕에, 지금도 차를 구입할 만큼의 돈은 있으니까.”

“……아렐.”


리즈는 재빨리 찻잔을 내려놓고 본론을 꺼냈다.


“전국의 미협 간에 의심스런 자금의 흐름이 있는지 조사하라고 난리도 아니야.”

“과연, 베네체의 전통대로네. 여자들이 모여 크게 떠들면 트집 잡아 입 다물릴 명분부터 찾는 거.”

“그런 말 할 때가 아냐.”


대수롭지 않게 비꼬는 말에 리즈는 조급해졌다.


“네가 지난 1년 간 미협을 전보다 빈번히 찾은 건 이미 알고 있어. 최근 여성 미술인 시위에 관여하고 있는 것도 대강은……그 이상 깊은 일엔 발 담그지 말았으면 해. 만약 네가 사법의 제재를 받는 일이 생긴다면…….”

“생겨도 책임은 내가 지는걸. 나 때문에 무고하게 연루될 사람은, 이제 내 주위에 아무도 없고.”

“나는? 난 여기에 있잖아!”


더 참지 못하고 외치자 아렐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내 모든 권한을 다해서 너의 신변과 명예를 지킬 거야. 하지만 내 힘이 못 미칠 만큼 네가 멀리 가 버리면, 그때는……난 네가 너 원하는 거 마음껏 하며 살도록 힘을 보태고 싶어도,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서는 건 두고 볼 수 없어.”


아렐은 한여름의 울창한 숲속보다도 푸른 눈으로 리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묵묵히 시선을 거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즈.”


자리를 비운 아렐은 곧 옆방에서 무엇인가를 가져왔다. 눈앞에 펼쳐진 물건을 보고 리즈는 크게 놀랐다.


예전에 어느 떠돌이 노파에게서 받아 아렐에게 선물한, 백, 회색, 흑이 각각 한 자루, 그리고 아렐의 눈 색을 닮은 녹색이 두 자루인 사각 콩테 세트. 그 케이스 안의 어느 콩테도 전연 새것처럼 반듯하고 말끔했다.


마치 이 다섯 자루가 작년의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그 놀라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쓰인 일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초록색의 세계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이걸 통해 처음으로 알았어.”


그러면서 아렐은 녹색 콩테 한 자루를 꺼내 리즈에게 내밀었다.


“녹색은 한 자루로도 충분할 거야. ……내가 이걸 다시 찾을 때까지, 네가 보관해 주었으면 해.”


그리 부탁하는 아렐의 눈빛은 단호하고 간절했다. 그렇잖아도 자그마한 몸은 야위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데, 눈빛만은 먼 옛날 이야기의 마법처럼 형형했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꼭 지켜 줘야 해.”


뒤이어 못박는 말이 리즈의 가슴속에 불길한 예감을 새겼다.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거야?”

“너라면 내가 어떤 결단을 내려도 지지해 줄 걸 아니까.”


아렐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리즈는 마음이 옥죄였다. 아렐은 무얼 결단하겠다는 것인가? 결단을 내려, 무슨 일을 하려는 거지?


아무것도 더 묻지 못하고 리즈는 그저 아렐이 내민 녹색 콩테를 건네받아 쥐었다.


“지금은 그게 다야. 언제, 무슨 이유로 이걸 돌려받으러 올지는 나도 아직 몰라. 결단을 좇아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으면, 그때가 그 날이 되겠지.”


부연하는 아렐은 평온해 보이는 반면, 리즈는 걷잡을 수 없이 초조해졌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러나 친구의 이 낡고 답답한 집 안에는 담배 연기 한 모금 뿜기조차 미안하다.


“담배, 요즘도 피우니?”


아렐이 지나가듯이 묻는 말에 리즈는 퍼뜩했다. 오늘 아렐을 발견하기 겨우 1분 전에 담배 꽁초를 꺼서 버린 사실이 생각난다.


“몸에 나쁘잖아. 일도 고될 텐데. 내가 그걸 돌려받는 날이 오기 전에 네가 금연에 성공한다면 좋겠네.”


그렇게 말하며 아렐은 혼자 웃었다. 그 일이 고돼서 흡연이 습관이 된 거 알잖아. 그렇게 항의하지는 못하고 리즈는 아렐을 쳐다보다 녹색 콩테를 내려다보았다. 녹색이라는 범주 내에서 서서히 미묘하게 변해 가는 작은 막대의 색은 어느 순간의 것도 마치 아렐의 눈빛을 보는 듯했다.


때는 봄. 베네체 미술전람회의 개최를 한 달 앞둔 날이었다.






매년 이맘때면 정부의 주관 하에 수도 틸로 곳곳의 화랑과 박물관에서 일주일 간 개최되는 베네체 미술전람회는 올해도 첫날부터 어김없이 왕국 각지의 주민들과 이웃 나라로부터의 관람객들을 끌어모았다.


하늘은 맑고 기온은 선선한 가운데, 사람들은 너도 나도 마음이 끌리는 대로 전시회나 퍼포먼스를 찾으며 봄날 예술 축제의 흥을 한껏 즐겼다.


이 들뜬 분위기 속에서 어느 누구도, 전람회의 안전을 책임지는 현장 요원들도, 무명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머리 전체를 가면으로 감추어 유령마저 연상케 하는 모습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나씩 몸에 지니고 서넛씩 어디론가 향하는 광경에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후 2시 경. 첫날 가장 많은 수의 방문객이 틸로에 머물러 있는 시각.


도시 동쪽 외곽은 예술 축제의 열기도 닿지 않는 듯 적적하고, 그 구석에 자리한 작은 지하 폐극장의 무대 위에는 천이나 가면으로 신원을 감추지 않은 여성 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콤벨력 19세기의 베네체에 존재할 법한 갖가지 회화와 조소 작품,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작품들이 가득한 무대, 그 중앙에 선 작은 체구의 여성은 녹색의 작은 그림 도구를 쥐고 있는 손을 들어올렸다.


녹색의 콩테가 여름 한낮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 같은 빛을 발했다.


그와 동시에 틸로 시내 곳곳에 무언가 변화가 일었다.


“이……이게 뭐지?”

“이런 게……좀전에도 있었나?”


거리에서, 화랑에서, 박물관에서 전시회며 퍼포먼스를 감상하던 관람객들은 크게 놀랐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마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과 사물, 풍경이 고금의 국가 공인 미술 작품들의 틈새와 국가 공인 행위예술 무대에 홀연히 나타나 있었다.


“총각……, 이 꼬마도 댁들이 데려왔소?”

“네? ……으아악! 아뇨, 아니에요!”


틸로 중앙 공원에서 퍼포먼스를 펼치던 한 팀의 팀원은 소스라쳐 비명을 질렀다. 하얗고, 보석의 광채 같기도 하고 햇살 아래 나뭇잎 같기도 한 녹색을 몸에 두른 어린 여자아이 형상의 무언가가 바로 곁에 서서 혼란에 빠진 군중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그 아이가 지난 해 어느 백작 부인, 이제는 백작의 전 부인인 이가 열었던 전시회에 내걸린 그림 속 여자아이와 쏙 빼닮았음을 군중 가운데 몇몇이 떠올리고 수런거리기 시작한 때, 아이는 이 소란을 배경음악으로 삼은 듯이 사뿐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같은 순간, 누군가의 그림, 누군가의 조형물로부터 생명을 받은 또 다른 형상들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춤을 시작했다. 크로키, 유화, 아크릴화, 수채화, 소묘, 석상, 동상, 소조 할 것 없이, 남녀노소 인간도. 동물과 곤충, 식물도. 도시의 시계탑과 전원의 물레방아도. 온갖 색의 조화도. 신화 속 존재들도.


춤추는 형상들은 곧 일제히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들었다. 경악에 찬 사람들은 뒤따르듯 허공으로 시선을 향했다.


“저길 봐!”


누군가가 완전히 얼이 빠진 채로 단말마처럼 외쳤다. 파랗던 하늘이 중앙 공원 위 지점에서부터 하얀 빛깔이 번지면서 순식간에 백색 캔버스처럼 변해 갔다. 공포에 질린 관람객들은 혼비백산해 아무 방향으로나 도망을 쳤다. 그들이 분주히 달리고 있는 땅 위도 하늘과 마찬가지로 캔버스가 되어 가면서 모두를 포위했다.


오로지 미술품에서 탄생한 형상들만이, 전시된 작품들과 시내 곳곳을 누비며 이 혼돈을 환호했다.


경비원도 경찰도 이들 환호의 몸짓을 막지는 못했다. 이 정도로 상식을 넘어선 상황 앞에서는 누구의 판단력도 별 힘을 쓸 수가 없다.


――먼 옛날, 미술은 누구나가 지닌 힘이었다.――


각자 도망치다 멈추어 선 지점에 발이 묶인 채 떨고 있는 사람들의 뇌리에 어느 여성들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우리의 선조들은 누구나 미술의 능력을 고취하고, 미술을 찬미하며, 미술로 자신의 영혼을 드높여 초월적인 경지를 추구했다.――


한 덩이가 된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들로 이루어졌는지 판별할 길이 없다. 목소리들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그 힘이 있다는 사실은, 이 나라와 이 사회가 형성되면서 이들을 지배한 권력자들에 의해 모두로부터 잊혔다.――

――권력자들은 대대로 권력을 독점하며, ‘진정한 미술’은 권력을 쥘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되었다고 모두를 속여 왔다.――


하늘의 캔버스에 모두의 눈에 보일 만큼 뚜렷한 점이 하나 생겨났다. 그 점은 수시로 빛깔을 바꾸며 하늘에 수채화 풍의 정교한 형상을 그려나갔다.


――그리하여 권력에서 가장 철저하게 제외된 우리는, 우리의 자매와 어머니들은 도화지를 펴고 연필을 잡는 것만으로도 미술을 더럽히는 자들처럼 죄악시되었다.――

――미술을 빼앗기고, 미술에서 지워지고, 잊혔다.――


어디서인지 모르게 말발굽 소리가 아득하게 울리고, 함성이 들려 왔다. 하늘을 뒤덮는 수채화의 무늬를 환영하듯 지상에서는 물감의 나무 총 십여 줄기가 싹터 굵게 뻗어 올라갔다.


――지워지지 않기 위해 버텨 온 우리가, 지금도 지워져 가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애 있는지, 지금 하늘을 물들이고 지상에서 환호하는 이 아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여러분 중 아무도 알 수 없겠지.――

――하지만 우리는 먼 옛날 미술의 힘을 간직한 도구들을 손에 넣었다.――

――그 도구들의 힘은 우리의 곁에 함께 있기를 택했고, 우리의 힘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우리의 흔적과 함께, 오늘 이 자리에 섰다.――


연필 크로키와 목탄화의 기마부대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각양각색 화풍의 형상들의 무리가 새살대며 달려왔다. 물감의 나무에 콩테로 그린 듯한 녹색의 잎사귀와 녹색 꽃이 피어나 질감을 바꾸어 보석처럼 빛났다.


――우리는 미술과 이 나라 국민들을 기만해 온 ‘진정한 미술’을 타파하고, 미술의 힘을 이 땅에 되살려, 사람으로 태어난 모두가 그 힘을 누리는 새로운 세상을 실현할 것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여성 미술가들의 외침과 동시에, 흑백의 기마부대도 그림의 무리도 꼼짝 없이 서서 넋을 잃은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 박물관, 미술관, 화랑, 그리고 미술품이 존재하는 모든 곳을 향하여 흩어져 돌진했다.






미술의 힘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 버린 베네체 왕국 초유의 사태는 사흘이 넘게 지속되었다.


틸로와 그 주변 지역 위의 하늘은 거대한 무늬로 이루어진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일렁였고, 땅은 각종 재료의 회화가 낳은 숲으로 곳곳이 뒤덮였으며, 잊혀진 그림에서 흘러나온 다양한 풍경들이 현실의 공간과 섞여 얽혔다.


아무것도 모르고 전람회 첫날을 구경하러 나왔던 이들 중 일부는 어찌어찌 자신들의 거처로 피신했고, 나머지는 고립되었다.


어느 쪽도 상황을 바꿀 대책은 없는 가운데 이들을 살펴 주는 것은 ‘여성 미술가들의 아이들’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박물관과 전시장 따위를 마음껏 누비고 다녔다. ‘아이들’이 지나간 장소에 그들이 직접 개입한 인명 피해는 물론 그 외의 별다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간혹 이들의 새 동료가 그림에서 솟아나 대열에 합류했다.


이를테면 여성 화가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베네체 중앙 박물관에 영구 전시된, <결별>이라는 제목의 그림 속 여인. 피 흘리고 죽은 남편을 안은 여인의 슬픔이 탁월하게 묘사되었다는 그 그림의 바로 그 여인은 한 손에는 남편의 잘린 목을, 다른 한 손에는 피 묻은 칼을 들고서 비장한 표정을 하고 ‘본래의 그림’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생기가 도는 모습으로 ‘아이들’과 틸로 시를 돌아다녔다.


군과 경찰은 사람들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위험을 겪지 않도록 애쓰는 것 외에 손쓸 방도가 없었다. 그들이 든 무기는 무용지물이었다. 세상 어느 물리력도 이 ‘아이들’을 제지하거나 없애지 못한다는 사실은 첫날 해가 지기도 전에 다 드러났다.


틸로의 사람들 대부분이 미술의 힘으로 구현된 그림의 세계 외에 다른 무엇도 생각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내는 사이에, 시내를 노니는 ‘아이들’은 왕궁에도 어려움 없이 발을 들였다. 궁의 병사들과 가신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역대 국왕과 왕족의 초상화가 벽면에 늘어선 복도를 ‘아이들’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급기야는 ‘저질 미술품에 국고를 탕진한 여자’로 역사에 남은 17세기 베네체의 여왕 미브노바도 초상화에서 나와 이 초자연적 혼돈에 감격한 표정으로 궁중 사람들 앞을 거닐기 시작했다.


――’진정한 미술’을 부수고, 모두가 누리는 미술을!――


혁명의 구호를 구가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무럭무럭 자란 그림의 나무들이 이룬 숲 사이에 메아리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울렸다.


닷새째 되던 날, 베네체의 국왕은 협상의 뜻을 밝혔다. ‘이 나라와 미술의 앞길에 관하여 논할 말이 있거든 나에게 전하라’던 ‘미브노바 여왕’은 왕과 협상 장소를 정했다.


장소는 틸로 중앙 공원. 미술의 힘에 의해 울창한 그림의 숲으로 변한 공원에 겨우 남은 공터였다.


경찰관과 군인들, 몇몇 관료를 대동하고서 왕은 숲 가운데 공터에 섰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문화예술청의 로잔드 백작은 사흘 전 ‘아이들’과 직접 맞닥뜨린 후 착란 증세를 보이며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저만치에 녹색의 빛을 두른 여자아이와 ‘미브노바 여왕’을 비롯해 ‘아이들’의 춤을 이끌던 ‘아이들’ 열다섯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틸로 동쪽 외곽으로는 한 부대의 군인과 경찰들이 단단히 무장하고서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혁명 나흘째. 정부는 ‘아이들’을 구현한 여성들의 본거지에 관함 정보를 기적적으로 입수했다.


무력은 미술의 힘이 구현한 ‘아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아도 미술의 힘을 부리는 인간의 심신에는 통한다. 반동분자들의 본거지를 습격해 우선 ‘아이들’을 매개로 여자들을 국왕 앞에 원격으로 무릎 꿇린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었다.


그 다음은 계집들을 체포해 이 끔찍한 사태를 불러온, 잊혀 가는 전설의 한 대목에나 상술된 고대의 도구들을 어느 경로로 손에 넣어 사용법까지 터득했는지 추궁하는 것이다.


부대에 섞여 폐극장으로 향하면서 리즈는 이를 악물었다.


만년필 모양의 케이스에 단단히 밀봉해 지금도 품에 지니고 있는 아렐의 콩테. 이것을 자신이 직접 다루어 이 상황을 뒤집고 아렐과 아렐의 동료들을 구할 수 있다면.


하지만 그 콩테를 리즈에게 처음 준 노파는 ‘미술의 힘을 잊지 않은 자의 손에서만 이 도구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리즈 자신은 어떤 미술 작품이 어디가 뛰어난가를 제 잣대로 짚어내는 것이 고작이지, 미술의 힘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 ‘미술의 힘’이 베네체를 발칵 뒤집어 놓고 아렐을 저만치 멀리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길로 데려간 지금도.


부대는 목적지에 당도해 어렵지 않게 지하로 들이닥쳤다.


그 순간 군인과 경찰들을 맞이한 것은 조금도 기대치 않은 광경이었다.


지하 공간은 잡동사니만이 어지러이 가득할 뿐 사람은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아직 조명이 꺼지지 않은 무대 위에도, 객석에도, 분장실과 대기실에도.


이곳저곳 샅샅이 뒤지다 무대 뒤에 이른 사람들은 눈앞의 광경에 압도당해 몸이 굳었다.


무대 벽면 반대편은 그야말로 그림 속의 숲으로 변해, 세상의 모든 색으로 빛나다 녹색으로 빛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육안으로 판별되는 그 ‘숲’의 가장 깊은 저편은 눈부신 빛을 발했다.


그 빛 안으로 여자들을 찾으러 들어갈 엄두는 아무도 내지 못하는 가운데, 빛은 꺼져 암흑만을 남기고, ‘숲’은 공기중으로 증발하듯 급속히 옅어져 마침내는 본래의 무대 뒤 공간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모든 순간을 지켜본 리즈는 가슴속에 깊고 시커먼 구멍 하나가 뚫리는 것을 통감했다.






‘혁명’은 닷새 만에 끝이 났다.


동쪽으로 출동한 자들이 극장 안으로 뛰어든 때, 중앙 공원에 나타난 ‘아이들’은 왕과 일행의 앞에서 말없이 옅어져 사라졌다고 한다.


틸로 전역과 왕실을 제 집 앞마당처럼 누비던 다른 모든 ‘아이들’도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와 동시에 땅을 메운 숲도 하늘을 채운 수채화도 말끔히 지워지고, 캔버스로 화했던 하늘과 지면은 본디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닷새 가량을 미술의 힘에 온 신경이 쏠린 채 버텼던 사람들이 혼란에서 스스로를 회복해 가는 사이, 정부는 여느 흑마술보다도 해괴했던 이 사태의 주동자들을 잡아내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그리하여 건진 것은 그 폐극장에서 입수한 미술 작품 몇 점과 반쯤 파손된 그림 도구들, 시내 곳곳에 버려진 하얀 무명 천 조각들 몇 장, 그리고 베네체에 존재하는 익명 미술가 모임 중 몇몇의 구성원 명단이었다.


폐극장뿐 아니라 명단에 이름이 오른 여성들의 거처 또는 작업실에서도 5일 동안 왕국의 수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망령들과 너무도 흡사한 미술 작품들이 압수되어 전부 폐기처분되고, 그 창작자인 여성 44명이 베네체 각지에서 체포되었다. 문제의 <결별>과 미브노바 여왕의 초상화는 각각 그림의 명성 때문에, 그림 속 인물이 옛 국왕이라는 이유로 폐기만은 면한 대신 검은 천이 씌워진 채 박물관 또는 궁의 창고에 처박혔다.


미술인협동조합 중앙회의 회장과 회장실 비서는 이번 난동에 물적 지원과 연락망 제공 등의 형태로 가담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은 끝에 각각 중형에 처해졌고, 체포된 미술가 44인은 자신들 외의 가담자를 물어도 끝내 함구하다 공개 처형 또는 수십 년의 강제 노역을 선고받았다.


미협 중앙회와 틸로 지점에서 정부 명령에 따른 대대적인 인사교체가 이루어지고, ‘계집들의 난’과 관련해 정부가 처리할 일이 여전히 산더미인 가운데, 리즈는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베네체 전체에서, 아니, 이 세계에서 아렐의 존재는 완전히 지워진 것 같다.


경찰이 입수한 반동자 명단에는 트레디포 회원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 아렐이 없음에 리즈는 의아해하면서도 안도헸다. 그러다 아렐의 전 남편 로잔드 백작이 ‘혁명’의 와중에 정신이 이상해진 채 자택에 틀어박혀 지내다 실족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로잔드 가 저택 창고에서 작자 미상의 로잔드 백작 초상화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들려 오면서 리즈의 의문은 증폭되었다.


그럴싸한 명분을 붙여 무모하게 로잔드 가까지 가서 확인한 바, 흑백 소묘로 그려진 그 초상화의 작자는 아렐임이 명백했다. 결혼하고서 복잡한 심경으로 그려 남편에게 바친 것이라고 본인에게 듣기까지 한 그 그림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로잔드 백작은 ‘혁명’ 당시 저택으로 피신한 직후 흑백 소묘로 묘사된 자신의 흉상이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둥둥 떠 다니는 광경을 맞닥뜨리고 어째서인지 미쳐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로 당황스러운 것은 그 소문이 아니라 로잔드 부인이 전처의 존재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열여덟 살 로잔드 부인은 자신이 죽은 남편의 불륜 상대였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에 부부 불화다, 불륜이다, 이혼이다, 제법 소문이 요란하게 돌았으니 모를 턱이 없는데도. 오히려 리즈가 ‘이전 부인’에 관하여 조심스레 묻자 검은 상복 차림의 로잔드 부인은 어디서 없는 사실을 날조해 자신을 모욕하느냐며 화를 냈다.


이후 이 집의 하인들조차도 아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맞닥뜨리고 리즈는 더 크게 당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인들과, ‘작자 미상’에 정체마저 수상한 초상화를 없에지도 어찌하지도 못하며 과부 된 자신을 슬퍼하는 어린 부인을 뒤로 하고 리즈는 완전히 혼란스러워져 저택을 나섰다.


이상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동쪽 외곽의 지하 소극장에서 입수된, <틸로의 딸들>이라는 제목의 커다란 녹색 소묘. 그 그림이 아렐의 개인전에 걸렸음은 고사하고 그것이 아렐의 그림이라는 사실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 그림 속 소녀와 똑같은 모습의 아이가 혁명을 춤추며 틸로 시내를 누볐다는 사실조차도.


한때 ‘아렐 리에타 디 로잔드 백작 부인’이었던 여성을 기억하느냐고 세상에 대고 물을 무모함은 리즈에게 없었다. <틸로의 딸들>은 소극장에 널려 있던 반파된 그림 도구들과 더불어 면밀한 검사를 받는 중이었다.


정부가 그 난리를 벌였음에도, 찢어진 도화지, 부러진 붓과 말라 비틀어진 각종 재질의 물감, 돌조각과 흙 부스러기 등의 진짜 정체며 이들의 입수 경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 도구 중에 아렐의 녹색 콩테는 군과 경찰이 극장을 뒤질 때부터 없었다.


마치 그 녹색 콩테가 아렐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 빛 너머로 고스란히 가지고 들어가 사라진 것만 같다.


어쩌면 그것과 똑같은 또 한 자루의 콩테를 지닌 이만이 아렐의 존재를 잃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거겠지.


경찰서 사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리즈는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두 팔에 파묻고 말았다.


키만 멀대 같고 센 척만 하고 다녔을 뿐, 아렐의 존재가 세상에서 말 그대로 소멸할 때까지 아렐을 위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혁명’이 있고서 2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베네체의 미술은 침체되었다. 국가 공인 미술가도 그 외의 미술가도 마음 놓고 자유롭게 미술 활동을 펼치지 못했으며, 국내와 주변국의 여론을 의식한 정부는 베네체 미술전람회를 두 번 건너뛰었다.


미술의 힘이 동원된 불가사의한 사건의 퍼즐이 완전히 맞추어지지 않은 가운데 모든 수사는 일단락되고, 베네체 정부는 국가 공인 미술가 제도를 개편하고 강화할 방안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변화는 바로 그 무렵에 싹텄다.


2년 전 44명의 여성 미술가들에 대한 처벌이 과도했다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조심스레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미술의 힘 혁명’도 각계각층의 관심사로 서서히 떠올랐다. 미술계와 다른 예술계, 문학계, 학계에서 차츰 활발히 논의되면서 예술 작품이나 칼럼, 논문, 학술 발표의 형태로 다양하게 다루어져 갔다.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미술의 힘 혁명’은 화재로 되살아나, 급기야는 연중행사인 불꽃놀이 기간에 ‘밤하늘에 그날의 공중 수채화를 재해석해 그려 보겠다’며 제법 그럴싸한 불꽃의 문양을 그려내는 자들도 등장했다.


18세기 여성 화가 도라 윈치의 대표작 <결별>이 작가의 사후 누군가에 손에 오늘날까지 알려져 온 그 슬퍼하는 과부의 모습으로 개조되었을 가능성도 문헌과 각종 연구를 바탕으로 이 무렵에 제기되었고, 생전 비공인 미술가들에의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미브노바 여왕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시도되었다.


한편으로는 재력을 지닌 여성들에 의한 여성 미술가 후원이 전에 없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2년 전 그 혁명의 여파로 스무 살이나 늙은 남편을 잃은 올해로 스무 살 로잔드 백작 부인이 상속받은 재산으로 여성 미술가들을 적극 후원하겠다고 나서는 데에 처음에는 여성 미술가들조차 반신반의했고, 일부는 대놓고 냉소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백작 부인의 결심은 흔들림이 없었고, 실천에는 성의가 있었으며, 마침내는 이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 미술인의 공동체가 하나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떠들썩함을 고스란히 목격한 정부는 아직 생존해 있는 혁명 가담자들에게 감형 조치를 내리는 한편, 국가 공인 미술가 제도의 개편을 미루고, ‘미술의 힘 혁명’으로부터 3년 후, 왕립아카데미 미술과 입학 자격을 중등 교육을 마친 모든 국민에게로 확장하면서 여성 입학생 상한선 제도를 폐지했으며, 배타적인 국가 공인 미술가 제도 대신 자질을 갖춘 미술인이라면 누구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미술의 힘 혁명은 닷새 만에 수포로 돌아갔어도, 3년 후의 베네체에는 이미 적지 않은 변화가 일었고, 미술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고 다채로워져 갔다.


변화는 일어도, 이 세상에 아렐은 돌아오지 않았다.


2년 반의 노력 끝에 금연에 성공했는데도 돌아와 기뻐해 주지 않는다니. 리즈는 혼자 한숨을 쉬었다.


혁명에 관여한 여성들이 응징되는 동안, 리즈는 처음으로 담배를 끊을 결심을 했다. 담배 연기 자욱한 남자 동료들의 집단에 매달리기보다 몇 안 되는 여성 후배들이 담배 없이도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여성 후배들과 함께 조성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그 무렵에 일었다.


중독성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는 극도로 어려워 몇 번이고 도로 가라앉았지만, 그날 아렐의 그 좁고 초라한 방에서 담배를 꺼내지 않은 자신을 떠올리며 포기의 유혹을 물리쳤다.


결혼과 출산, 양육,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 이 나라에서 여성이 경찰관으로서 생활하기는 여전히 고되지만, 담배와 결별한 지금 머릿속은 한결 맑아졌고, 자신을 포함한 틸로 경찰청 소속 여성 경찰들은 한결 당당해진 것을 느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아렐을 마주한 뒤로 5년, 10년, 20년이 흘러도 아렐과 재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단을 좇아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으면, 그때가 그 날이 되겠지.


아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여태 손에 넣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지금도 무사히 살아 있기는 한 건가?


늦은 밤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경찰서를 나서며 리즈는 다시 한 번 착잡한 의문을 떠올렸다.


2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리즈는 결혼하거나 결혼 상대를 찾는 일 없이 커리어를 이으며 살아 왔다. 어머니도 돌연사로 세상을 떠나신 지 1년, 그 충격과 슬픔도 옅어진 지금, 늦은 밤의 귀갓길은 자신을 기다리는 이 하나 없이 쓸쓸한 동시에 느긋하다.


케이스 안에 고이 보관한 녹색 콩테의 빛깔은 여전히, 시시각각 미세하게 변화하는 아렐의 눈 색깔을 빼닮았다.


귀가해 소파에 앉아 콩테를 들여다보며 그렇게 생각하던 50세의 리즈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한결 건강해 보이네.”


그렇게 말을 건네며 웃는 이는 20년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아, 렐……?”


내가 꿈을 꾸는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처럼 돌연히 사망하기 직전에 사신이 옛 친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라도?


“내 소원을 하나 들어 주었구나. 고마워.”

“고마울 것까지야…….”


푸른 눈이 짓는 미소 앞에서 의아함은 눈 녹듯 잊히려다 되살아났다. 사방은 하얗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렐뿐이고, 그리고.


“너……아렐 맞아?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20년이나 지났는데, 이런 상황은 있을 수 없어…….”

“혁명에 반감을 품은 자들이 있었어.”


아렐은 물음에 상관하지 않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자들끼리만 미술의 권리를 찾고, 하층민이나 타 인종을 챙기지 않으면 혁명도 있을 수 없다고, 여성 미술인 단체의 혁명에 자금을 보탠 외부인들 중에 몇몇은 그렇게 주장했지. 그래도 우리가 뜻을 관철하자 못마땅하게 여겨서 정부에 우리의 정보를 흘렸다나 봐.”

“뭐, …….”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말에 리즈는 기가 막혔다.


“어이없네, 저들이 진작에 여자들의 권리도 존중했다면 너희끼리만 뭉쳐서 그 난리를 쳤겠어?”

“그러게.”


아렐이 눈을 내리깔며 동의했다.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 중에 여력이 되는 이들은 어떻게든 몸을 피해야만 했어. 미술의 힘에 능한 사람이라면 특히……. 모처럼 우리 손에 들어온 귀중한 힘이 우리의 죽음이나 몰락과 함께 소실되거나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는 건 아무도 원치 않았거든. 그래서……힘을 지닌 미술 도구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도구와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까지 자신들 중 가장 미술의 힘이 강력한 한 사람을 힘의 원천인 이세계로 보낼 문을 그려냈어. 결국, 그날……극장에 모인 사람들 중, 나만 살아남았지.”


담담히 그때의 일을 밝히는 사이 아렐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미술의 힘이 강력하다는 건, 초월의 영역인 이세계와의 연결고리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니까. 동료들의 힘까지 한데 모아 미술의 힘을 이세계로 가져가 지키는 역할은, 이세계에 가장 적합한 인물에게 맡기는 것이 최적이지.”

“그런…….”


리즈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저기, 아렐.”


한참 침묵에 잠겨 있다 리즈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네가 원하는 걸 얻으면 콩테를 돌려받으러 오겠다고 그랬지……. 원하는 건 찾아냈어? 그……이세계에서?”

“글쎄, 어떨까.”


아렐은 조금 씁쓸히 웃었다.


“반은 틀리고, 반은 맞겠지.”

“무슨?”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 말에 리즈는 퍼뜩했다. 여성 미술인들의 현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제 베네체는 미술을 배우고 미술가로서 국가의 후원을 받을 자격에 예전과 같은 차별을 두지 않지만, 많은 경우 여성 미술가들은 커리어를 장기간 잇지 못했다. 여성 경찰관들이 겪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 이들의 발목을 잡기 일쑤로, 여성 미술가가 가정의 일에 신경을 쏟는 사이 마찬가지로 가정을 가진 남성 미술가들은 저만치 앞서가며 승승장구했다. 제 아내에게 가정의 일을 죄다 떠맡기고서.


더구나 아렐과 동료들이 외치고 발휘한 미술의 힘은 학계에서 꾸준히 연구되기는 해도 고대 마법처럼 오늘날에는 다시 사용할 방도를 찾기가 불가능한 능력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때 리즈의 눈살은 어느 예감에 찌푸려졌다.


“그럼……설마, 이세계의 힘을 다시 이 세계에 풀어놓을 방안이라도 찾아낸 건가?”

“그건 나도 모르겠어. 다만…….”


중간에 말을 끊고서 아렐은 마술이라도 부리듯 한 손에서 녹색 콩테를 꺼냈다.


“세계를 넘어서 난, 비로소 세계의 모든 색을 보았어.”


그러더니 아렐은 콩테로 작게 원을 그렸다. 리즈의 시야가 하얀 빛으로 덮였다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 기념……이라기엔 뭣하지만, 너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어.”


언제 나타났는지, 아렐의 품에는 아기를 싼 듯한 포대기가 하나 안겨 있었다. 아렐은 말없이 그것을 리즈에게 내밀었다.


포대기 안에는 정말로 아기가 하나 잠들어 있었다. 반쯤 뜨고 리즈를 올려다보는 두 눈은 아렐의 눈과 똑같은 빛깔을 띠었고, 머리카락 색도 아렐과 같은 칠흑색이며, 피부 또한 아렐만큼, 혹은 아렐보다도 뽀얗다.


눈 색이나 머리 색, 피부색은 차치하더라도, 이 아이는 아렐을 너무나도 빼닮았다.


“선물? 이, 이 아기가……!?”

“이 아이 하나를 ‘그려내기까지’, 인간 세계의 기준으로 십여 년은 걸렸어.”


그려냈다니? 리즈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내가 ‘그려낸’ 대로, 이 아이는 성장하겠지. 마치 보통의 인간처럼……. 그리고 어른이 되고, 화가가 되고, 정해진 날이 오면, 나를 다시 만나러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오겠지. 그리고, 그때는 결정해야 해. 인간의 세계를 어떻게 혁명하고 싶은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들을 늘어놓고서 아렐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까지 네가 이 아이를 보살펴 주었으면 해. 어렵진 않을 거야.”

“너, 너……, 이게 말이 돼? 난 여태 애를 기르는 일은 생각도 안 해 봤다고! 아무 준비도 안 해 놓은 사람한테 이렇게 갑자기 아기를 내밀고 돌봐 달라고 하면 애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괜찮아. 혼자 두더라도 이 애는 ‘그려진’ 그대로 자라날 테니까. 단지 인간의 세계에서 살려면 누군가 보호자가 곁에 있는 편이 적응하기 편하겠지.”


상식을 저만치 초월한 말들을 연이어 듣고 리즈는 정신이 멍해졌다. 어떻게든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려 이마를 감싸쥐어 보았다.


“걱정 마. 나도 걱정 안 해. 너라면 잘 해낼 테니까.”


활짝 웃는 아렐을 보면서도 리즈의 마음은 여전히 복잡했다.


그토록 무사하기를 바랐던 옛 친구는, 평범한 인간 여자였던 친구는, 다른 세계로 떠나기 전에 미술의 힘을 타인이 맡긴 몫까지 한 몸에 담아, 그것을 갈고 닦아……신과 같은 존재라도 되었단 말인가?


자신을 본뜬 형상의, 성장 과정과 시간과 운명을 지닌 생명을 ‘그려내는’ 신적 존재?


아렐은 도대체 이 아이 하나에게 어떤 혁명을 바라는 것일까? 리즈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니 그 끝을 보고 싶다고,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끝이 있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체 모를 무거운 운명을 지고 창조된 아이의 힘이 되어 주고 싶다고.


자신이 오래 전 아렐을 지키지 못한 그 몫까지 더해서.


“어머니가 된 적도 없는데……순식간에 딸에 손주까지 생긴 느낌이네.”


리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렐로부터 아이를 넘겨받았다. 아기는 품속에서 얌전했다.


“콩테는……계속 갖고 있다가, 이 애가 성인이 되거든 물려줘.”


그 말에 리즈는 아렐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이름은, 네가 지어 줘. 어떤 이름일지 벌써 기대되네.”

“기대는 또 무슨. 내 작명 센스 알면서.”


조금 퉁명스레 대꾸하자 아렐이 활짝 웃었다.


“고마워, 리즈.”


미소가 더없이 밝다고 느낀 때 시야가 눈부시게 하얘져 갔다. 다시 정신이 든 때에는 여느 때와 같은 자신의 집 안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문득 품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자신의 두 팔에는 아렐을 빼닮은 아기가 안겨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세계가 기억하지 못하는 여성이 미술의 힘으로 탄생시킨 아기가 그 여성의 친구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모르게 세계에 온 지 5년, 여성의 친구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틸로 경찰청 총장 자리에 올랐다. ‘총장이 아는 친구의 부탁으로 손주 삼아 맡아 기르는 아이’는 말썽 한 번 일으키지 않고 똑똑하고 의젓하게 자라났다. 아이에게는 성별이 있고, 그 성별과 일치하는 성별 정체성이 있지만, 마치 세상의 두 성별을 합쳐 놓은 듯이, 혹은 어느 성별에도 속하지 않는 듯이 자라났다. 그리고 이 아이가 바라는 모든 아름다운 색깔은 이 세계에서 찾을 수 없다고 정해진 양,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색깔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채로 화가로서의 재능을 키워 나갔다.


그렇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속할 곳’에 속하도록 강요받는 인간 세계에 온 이 아이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은 곧, 그날의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미술의 힘이 낳은 아이가 자신이 속할 곳 없는 세계를 넘어 제 운명을 깨닫고 어머니를 만나는 날까지, 혁명의 전람회는 끝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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