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의 이야기는 글쓴이의 개인적 유・무형의 경험에 근거하며, 연성과 2차 창작성 망상에 대한 글쓴이의 가치관이 대다수의 연성러 및 연성 소비자 분들의 그것과 판이할 수 있음을 먼저 밝혀 둔다.)


서브컬처 컨텐츠, 쩜오디, 기타 등등. 각종 팬덤 내의 '덕질'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2차 창작이고, 2차 창작은 그만큼 팬덤에서 당연한 활동으로 받아들여져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수많은 덕후들이 타인의 2차 창작물과 자신의 2차 창작 활동에 열광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도 어느 사이엔가 2차 창작 향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얼마 안 가 있지도 않은 역량으로 팬아트 그리기를 처음으로 시도했고, 수년 전에는 팬픽션에마저 도전하기에 이르렀다(그리고 얼마 전에는 원고에도).


그냥 한 번 2차 창작 끄적여 보는 정도의 장르들이 많았지만, 딴에 온갖 열정을 2차 창작에 쏟아부은 장르도 개중에는 있었다.


사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 장르의 팬픽을 쓰는 일에  열중했던 터였다.


그러다 최근 들어서 나 자신의 어느 의문의 벽에 부딪히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에 대해 도출한 답이 모든 것을 바꾸고 말았다.


아니, 이것은 어쩌면 내게는 이미 정해진 채 서서히 진행되어 온 수순 아니었을까.


그 의문인즉 한 마디로 다음과 같다.


내가 지금, 무엇을 바라서 2차 창작 스토리를 짓는가?


질문을 앞에 두고서 우선 처음으로 팬픽션을 쓰기 시작한 계기를 생각해 보았다.


그때는 그토록 빠져서 무수한 고찰을 하게 만든 작품 A에 대하여 내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를 팬픽션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싶어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당시의 의식은 그렇게 느꼈다.


그렇게 시작한 팬픽션 집필이 가면 갈수록 원작의 전개며 결말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내 마음대로 상상해 글로 묘사하는 데에 치우치게 되었고, 급기야는 갈라파고스라 형언해야 마땅한 지경에 이르렀다.


'(내 딴에는 열심히 썼어도)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상황이 갈라파고스화의 주된 원인에 끼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이를 본격적으로 깨달은 때가 불과 얼마 전이다.


요 반 년 사이를 나는 틈만 나면 다른 장르 B의 팬픽션을 쓰면서 보냈었다. A라는 작품의 특성 상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시도들도 B에서는 얼마든지 거리낌 없이 구사할 수 있었고, 그만큼 나 자신(정확히는 자신 중에서도 B에 공명하는 부분)을 연성에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곡 즐겁고 편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캐릭터 붕괴나 작품 붕괴를 최소화하며 '내 글'을 쓰려면 B의 이모저모를 철저히 파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정황이 복잡하니 생략하고 요점만 밝히자면, 내가 B라는 작품을 좋아한다면 그 작업이 즐거워야 하는데 그 일은 즐겁기는커녕 내 멘탈에 버겁고 결국 충분히 수행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B는 내가 열렬히 좋아할 수밖에 없는 부분과 절대로 좋아할 수 없는 부분이 양립하는 작품이다. A도 그렇기는 하지만 이 양면성은 B가 훨씬 심하다.


그 첨예한 모순을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연성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나는 사서 시달리며 알게 모르게 멘탈의 온갖 밑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왜 스토리 연성을 하는지.


무엇 때문에 구태여 타인의 창작 세계, 내 것이 아닌 컨텐츠를 내 것인 양 주무르는 짓을 계속하는지.


이들 연성을 매개로 같은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소통하고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인정받고 싶다는 찌질함도 원인이라면 원인이지만, 그보다 어쩌면 더 본질적이면서 여태 확연히 인식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창작을 하지 못하니, 타인의 예술 세계에 기생하고 마는 거다.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예술 세계에조차 억지로 빌붙어, 남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이나 얹고 앉아 있는 거다.


어차피 나는 멘탈 자체가 '스토리를 상상하고 창작할 능력이 결여된 멘탈'이라, 팬픽을 쓰는 것조차도 어찌 보면 기적 중의 기적이다.


능력이 결여되었다 함은 길치가 평생 길치고 운전치가 평생 운전치인 것과 똑같다. 그런 주제에 스토리를 쓰고 싶다는 욕구만 빈 깡통처럼 요란한데, 그게 어느 순간 돼먹지 않은 인정 욕구와 맞물려 '팬픽을 쓴다'는 행위를 낳고 말았다.


그 짓을 수 년째 이어 왔는데, 이제야 그게 나 자신을 위해서도 다른 팬들을 위해서도 못 할 짓임을 절실히 깨달은 셈이다.


내 것도 아닌 세계를 내 것인 양 비틀고 주무르며 개조하기란 여러모로 정신력을 대폭 소모하는 일이다. 남의 것을 내 것처럼 인식하도록 멘탈도 단련(?)해야 하고, 그 '남의 세계'에 최소한의 헌신을 지속적으로 바쳐야 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과 타인의 세계(장르)와의 관계도 끊임없이 조율해야 한다.


조율은 차치하더라도, 나로서는 저런 자기 멘탈의 기만(나쁘게 말하자면)도 타인의 세계에의 헌신도 애초에 무리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타인의 세계에 대단히 매정한 인간이다.


그럴 정신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이제는 그걸 전부 1차 창작, 즉 진짜 '내 것'을 창조하는 창작에 쏟아부을 때다.


그 결과물이 이야기라 불릴 자격은 있기나 할지, 남들에게 보여 줄 수는 있는지, 그걸 몇 명이나 찾아 줄지, 그리고 이로 인해 내가 얼마나 모자란 인간인지가 어느 정도까지 폭로될지는 중요치 않다. 어떻게 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남의 것인 컨텐츠에 빌붙지 않을 것이다.


스토리 연성을 전적으로 그만두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 창작하지 못하니 남의 능력에 묻어 가는 짓'은 아주 그만둘 작정이다.


남과 소통하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1・2차 창작만이 아닌 인생 전반에서 충족하고 조율해 나가야 함도 이 기회에 스스로에게 주지시키고.


끝으로 A와 B의 창작자 여러분, 나는 당신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A와 B를 만나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각성하고 성장할 수 있었으며, 연성에 꾸준히 매달린 덕에 구제할 길 없던 글과 그림에도 실낱 같은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빚을 갚는 일은 내가 죽을 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단코 내 것일 수 없는, 모든 것을 사랑해 줄 수도 없는 당신들의 세계에서 수백 발짝 물러나, 당신들이 내게 안겨 준 모든 것을 동원해, 이제는 지금까지 염원해도 형태조차 부여하지 못했던 '내 것'을 만들어 완성의 경지에 근접시켜 나갈 것이다.

부디 당신들의 세계에도 당신들에게도 축복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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