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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우기에 새기는 끝없는 음표

지워지지 않는 우리의 음표는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리라

핏기 잃은 창밖에 수만 초록빛 건반이 물결쳤다
물기 어린 보호색의 공명이었다

넌 누구, 빗방울?
아니, 나는 바람
끝없는 우기를 방랑하는 바람

명징한 초록이 또랑하게 흔들렸다
오랜 회색 물기를 한 번 갈랐다

넌 어디서 왔니?
내 선율로 가른 그 틈새 너머에서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찬란한 세계에서

왜 돌아갈 수 없어?
이 장마에 끝이 없으니까
이 장마 속에서 너희를 보았으니까

무엇을 보았지?
아마 너도 보아 왔을 모든 것

오늘 새벽에도 누군가가 빗방울에 맞아 죽었다
오늘, 아무도 죽지 않았다

비는 언제나 옳았다
우리는 언제나 틀렸다

괴롭지 않아?
너야말로, 괴롭지 않아?
괴로웠어
사라지고 싶었어
빗소리 없는 저 땅밑에 파고들어
그래도 이젠 괜찮아
널 알았으니까
너도 보았음을 알았으니까
너의 초록빛 선율을 알았으니까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어
이 세상의 끝까지

습한 침묵 끝에 초록빛이 속삭인다

눈 감아 봐
몸이 창밖으로 떠오름을 느껴 봐
쏟아질 듯한 물기도 두려워 말고
이 선율에 몸을 실어 봐
그리고 나와 함께 가자
빛나는 도시 별빛 아래 대지
지상 가장 높은 곳 가장 깊은 곳
찬란한 번영 증오의 잿더미
이 모두를 마음에 담으며
노래하자
이 모든 곳에서
집요한 비에 핏자국째 씻겨 지워진
그렇게 씻겨 지워질 우기에 맞서는
너희를 위해 노래하고 연주하자

우리의 음표 지워 없앨
외눈의 잿빛 하늘보다
더 큰 목소리로 더 맑은 목소리로
하늘에 땅에 물에 대기에
지상 모든 생명의 꿈에
우리의 음표를 새기자

그 선율은 그 음표는 지워지지 않아
머나먼 언젠가 이 우기가 걷혀도
맑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어도
아니
이 재색 피눈물의 세상이 이대로 멸망해도

우리의 음표는 끝없는 우주를 여행할 거야



2017.08.24. (수정: 2018.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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