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아파트 전체가 ‘무’에 침식되기 시작한 뒤 어떻게 북서울꿈의숲까지 도망칠 수 있었는지 경은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노금이 파괴되고 제섭의 주율이 소멸해 하나 둘 의식을 회복하나 싶던 주민들은 삽시간에 흑백으로 물들고 반투명해졌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와중에 경은은 민채와 여림을 데리고 정문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쓰레기장 앞에서 발을 구르던 주희도 ...
— 이건 엄마가 만들어 주셨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하셨대. 아기일 때는 발찌였고 그 뒤로 계속 늘려 주셨지. 어릴 적엔 매일 차고 지냈던 것 같아. 피아노 연주할 땐 뺐지만. — 지금은 피아노를 거의 안 치잖아? 요즘은 왜 잘 안 해? — 이걸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아야 진료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 거니까. — 그런 법이 어딨어. 바보 같아. — 맞...
경은은 초조한 마음으로 104동 뒤편 주차장까지 달려갔다. 저만치에 하얀 나무가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무 근처가 전혀 적적하지 않았다. 최소 백 명은 되는 사람들이 모여 나무를 향해 서 있었다.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느닷없이 결계의 주율이 뒤틀렸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주율은 금세 원상태로 돌아왔다. 대신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결계 안에서 수런거리기...
1월 12일의 늦은 저녁. 스쿠터를 몰아 귀갓길을 달리는 경은의 마음속은 어수선했다. 어젯밤의 일은 단원들에게 알렸고, 술렁이던 단원들은 경은과 함께 대책을 냈다. 우선은 다음 날 단원들이 A아파트를 찾아와 조제섭을 불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제대로 실행되기만 한다면 A아파트는 무사할 것이고, 여림은 앞으로 조제섭에게 도구로 이용당하지 않아도 될...
“혜은 씨.” 등 뒤에서 다시 한 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은은 리코체를 꽉 쥐고 불청객을 돌아보았다. 제섭이 등에 파수주율 장비를 담는 베낭을 메고 서 있었다. 용모가 한결 깔끔하고 곁에 여림이 없는 점을 제외하면 이 단지에 처음 나타난 날과 흡사했다. “참. 경은 씨던가?” “……뭡니까?” 이 자가 나를 기억하고 있으면서 무슨 꿍꿍이로 여태 모른 ...
“언니, 요즘 동네 분위기 좀 이상하지 않아요?” 2029년 첫 토요일의 오후. 주희의 초대로 주희와 민채의 집을 찾은 경은에게 민채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 어떤 점이?” “그 아저씨가 오고 나서 다들 달라졌어요.” “……어떻게?” “전 여기서 6년을 살았어요. 제가 처음 왔을 때에도 전부 여자들만 있었고, 여자들끼리 계속 잘 생활했어요. 살기가 이렇게...
경은은 2024년부터 북서울꿈의숲 동문 근처의 A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북서울꿈의숲과, A아파트처럼 북서울꿈의숲에 인접한 극히 일부의 땅은 면적이 북서울꿈의숲의 8배에 달하는 위험지대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안전지대였다. 2020년대에 위험지대란 ‘안개’의 농도가 극도로 높고 ‘안개’의 흐름도 불안정해 일기예보를 매일 확인해도 언제 어느 장소가 짙은 ‘안개’에...
별도의 준비가 필요 없다는 언니의 말에 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전형에 응한 경은을 맞이한 것은 어학 시험, 대기업 인적성검사인가 싶은 필기 시험, 면접, 그리고 공상과학 영화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작은 시설에서 행해진 ‘음악 시험’이었다. 음악 시험을 실시한다는 안내를 받고 경은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여성단체라는 조직이 무엇 때문에 입사 지원자의 음악 ...
‘무’에 갇혀 보낸 2020년도만큼 내가 살아 있음을 실감한 적이 있었던가. ‘무’와 ‘유’를 아는 극소수의 한국인 중 하나로서 경은은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2010년도 말의 몇 해 동안, 경은은 한국인의 삶이란 여러 해에 걸쳐 세계에 의해 살해당하는 느린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덥고 추운 여름과 겨울. 언제부터인가 사시사철 기승인 미세먼지까지. ...
대한민국 표준시 2019년 9월 24일 자정. ‘무(無)’는 해방되어, 동이 트기도 전에 한반도의 반 이상을 덮었다. 우주 만물의 존재 그 자체인 ‘유(有)’. 우주의 근원이자 이면인 ‘무’. 인류의 대부분은 ‘유’와 ‘무’를 모르는 채로 ‘유’의 세계를 살아 왔으며, 양분된 한반도의 남쪽 사람들, 즉 한국인들은 해방된 ‘무’가 만물을 덮어 변화시키는 현상...
“‘파수주율(把守宙律)’.” 긴장에 뒤따른 침묵을 틈타 나는 그 용어를 연주하지 않고, 발음했다.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파수한다는 뜻일까?” 한탄과 자조가 기어이 묻어나고야 마는 이 발음의 속뜻을 짐작할 겨를조차 없이 너는 내 눈앞에서 무방비하게 굳었다. 너의 귀에 울리는 목소리를 지금 너는 반신반의하겠지. 마치 자신의 호흡을 자각한 사람이 자기가 평소...
동사한 세계 위에 투명히 날아오른 분이시여당신은 이 마음 이 몸의 온 세포들이 우러르는 왕이십니다이 차가운 세계 위에 떠는 숱한 마음 숱한 몸을얼어붙는 추위 안에서 웅크리지 말고 걸으라 명하시어얼지 않는 정원으로 이끌 유일한 분이십니다따스함의 낙원을 갈구하던 민중은당신을 맞이하기도 전에 얼어 목숨을 잃었으나유일하게 살아남은 나는 압니다당신이 살아 있으라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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